[C::기타]/글챌린지 50(19.07~)

새장을 열리게 하는 오명의 방법

CAGAMINE LANJIE 2021. 5. 25. 01:53

 

 

 

- 글 챌린지 50 :: No 15. 새장

- 기존 썰 기반, 자캐즈 서태훈과 일부 서비훈 로그.

- 1만자 정도.

 

 

 

 

 

 

 

문을 열고 들어서면 홀이 있었다. 황궁의, 넓고도 고요한 홀. 안으로 들어서면 황좌 바로 아래에까지 길게 깔린 붉은 카펫을 밟을 수 있었다.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보면 눈앞에는 곧 하얀 대리석 계단이, 그리고 그 위를 올려다보면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실 것만 같은 황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자리하는 소년은, 그 모든 것의 주인이었다.

 

 

 

언젠가의 제국에는 피바람이 분 적이 있었다. 마치 혜성에 실려 떨어진 것만 같이 홀연히 나타난 소년은, 몇 주만에 제국의 개국공신이었던 대공작가 다섯 중 셋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수많은 백작가들과 기사들이 소년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변하는 것은 순간이었고, 이윽고 소년은 그들의 힘을 등에 업고 황제에게 칼을 꽂아 무력으로 제관을 빼앗았다.

제국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소년 황제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황좌에 앉자마자 자신을 도왔던 대공작가 셋을 멸문시켰다.

 

 

 

소년 황제는 제관을 쓰자마자 까맣게 죽은 눈을 한, 어린 폭군으로 변했다.

 

자리에 앉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공작가 셋을 멸문시키고, 자신을 지지했던 거대한 세력들을 전부 쓸어버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로 목이 달아난 후작가나 백작가는 그 수를 다 세기 힘들 정도였다. 이상하게도 소년을 지지하지 않았던 대공작가 둘은 살아남아 그 지위까지도 유지를 하고 있었으나, 살아남은 이에게 관심을 줄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처지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소년은 그 외에도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일이 잦았다. 제관을 쓰기 전에도, 쓴 후에도 소년은 모든 이에게 말을 놓는 일이 없었다. 옷 시중을 드는 사용인에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느라 사용인이 기절해버린 일은 이제 그리 특이한 축에 들지도 않을 정도였다.

 

매번 제관을 떨어뜨리고 다니는 것은 기본이고-이 때문에 항상 따라다니며 울상으로 제관을 줍는 사용인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소년은 황제의 복식이 귀찮다며 마치 서민과도 같은 간단한 의복 위에 황제의 망토만을 두르고 다녔다.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진검을 허리에 차고 다녔으며, 거슬리는 것들은 전부 그 검으로 반토막을 냈다. 한 번은 백작가와 같이 식사를 하다 식탁을 반으로 썰어버린 일이 있었는데, 백작이 납작 엎드리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음식을 준비한 사용인들에게 사과를 했다 하더라.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항상 옳은 말을 하기로 이름이 나있는 후작가의 비난은 귀기울여 들으면서도, 자신을 칭송하는 백작가는 그 자리에서 처단했다. 그러다가도 제국에 도움 되는 일을 하는 뛰어난 후작 몇몇을 퇴짜놓아 자신의 영지로 되돌려 보내놓기도 했고, 자신이 내쫓아놓고는 그 후작들의 영지로 직접 행차하기도 했다. 결국 황궁의 핏자국을 닦을 천이 떨어졌다는 사용인들의 말에 크게 웃으며 자신의 옷을 내놓은 것은, 두고두고 어린 폭군의 미친 업적으로 회자되었다.

 

 

그럼에도 궁 내의 사용인들은 겁을 먹을지 언정 폭군을 크게 두려워 하지 않았다. 이 어린 폭군은, 귀찮은데 움직이지 말라며 방 밖에 서 있는 사용인을 뻔히 놔두고는 직접 식료품 창고로 행차해 차를 우려온 전적까지 있었다. 차가 우러날 동안은 창고에서 놀고 있던, 한 사용인의 어린 아이와 놀아주었다더라. 소년은 유독 사용인들과 백성들에게 친절했다. 폭군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지위가 있는 이들 뿐이었다. 소년은 그런 것들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저 죽은 눈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황궁을 휘저어 놓고 귀족들을 쥐락펴락 해댔을 뿐.

 

 

 

그럼에도 소년은 그 모든 것의 주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 모든 것은 소년의 마음대로.

 

 

"... ..."

 

 

고단한 듯 눈을 감고 있던 소년이, 눈을 떠 아래에 나뒹굴던 붉은 것들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넓고도 고요한 홀, 그 위의 하얀 대리석 계단. 그 위에 자리한 황좌에 앉은 소년. 그리고 그 아래에 뒹굴고 있는, 생명을 잃은 무의미한 살덩이들. 마치 뒹굴고 있는 먼지덩이들을 보듯이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로, 소년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년의 다리에 기대어 간신히 서 있던 검이 쇳소리와 함께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선 소년이 바닥까지 흘러내리는 망토를 질질 끌며 창가로 향했다. 비틀거리는 그의 걸음에는 목적이 없었다. 창 밖으로는 이미 저녁 어스름이 깔린 황궁 밖이 보였다. 소년의 다리에, 붉은 망토가 떨쳐낼 수 없을 것처럼 엉겨붙었다. 소년의 초점 없는 시선이 창 밖을 향했다. 소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힘없이 어두운 창문을 더듬었다. 소년의 손에 닿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폐하."

"무슨 일입니까."

 

 

적막을 깬 것은 익숙한 목소리 하나였다. 항상 소년의 곁에 있던 사용인 중 하나였다. 소년이 느릿하게 창문에 머리를 툭 기대었다. 소년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왕관이 옆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년은 부러 손을 들어 그를 고치는, 소모적인 짓을 하지는 않았다.

 

 

"옆나라의 사신이 도착하였사옵니다."

"아, ... ... 지금은 단선, 이라 하던 그곳입니까."

"예, 알현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귀족 회의에게 처리하라 이르겠습니다."

 

 

여즉 천천히, 소년이 창문에서 몸을 떼어내고는 비척거리는 걸음을 이어 왕좌로 향했다. 굴러다니던 검을 아무렇게나 집어든 소년이 허리도 채 들지 않고는, 흘러내린 갈빛 머리칼 틈으로 제 앞의 사용인을 쳐다보았다. 검게도 죽은 어두운 눈이, 언뜻 금빛을 띄었던 것도 같았다. 사용인이 겁을 잔뜩 먹은 것이 보였으나 소년은 굳이 얼굴을 펴지 않았다.

 

 

"더 할 말이라도."

"그, 그것이, 폐하......"

"말씀하시지요."

"그들이 지금...... 지금 당장 뵙기를 청하였사옵니다."

"지금?"

"예, 그, 그것이...... 최대한 빨리 다시 입궁을 해야한다 하여, 폐하께 말씀을 올리라고......"

 

 

소년이 잠시 생각을 하는 듯 사용인을 바라본 채로 말이 없었다. 왕관이 결국 흘러내려 땅을 뒹굴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것에 사용인이 겁을 먹어 힉, 하는 숨 소리를 냈다. 소년이 이윽고 남은 손을 움직여 왕관을 주워들었다. 아무렇게나 머리에 이는 것 마냥 불경하게 왕관을 한 손으로 올린 소년이, 들러붙는 망토를 검으로 베듯이 밀어내고는 허리를 들었다.

 

 

"안내하시죠."

 

 

 

 

*

 

 

 

 

응접실은 어둡기 그지 없었다. 방 안의 불은 부러 켜지 않은 듯 했다. 벽면에 자리한 벽난로의 붉은 불길만이 방 안의 유일한 빛줄기였다. 넓은 방 안에는 기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사이를 화려한 의자 몇 개가 드문드문 메우고 있었다. 그 가장 끝에 앉은 이는, 벽난로의 불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붉은 불길에, 그의 지팡이 끝에 달린 금빛 장신구가 노을 같은 빛을 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질질 끌리는 발소리를 흘리며 느린 걸음의 소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찾으셨다고요."

"... ..."

 

 

조용한 응접실, 망토를 입은 소년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소년이 한구석에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맞은 편에 앉은 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도, 그는 소년이 다리를 꼬고 앉은 것과 제법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소년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멀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둘 사이에는 장작이 타는 소리만이 존재했다.

 

 

"... ..."

"... ... 급히 찾으셨다던데, 시종 하나가 거짓말을 하는 취미가 있나 봅니다."

"... ..."

"... ... 그럼 피차 저도 바빠서."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앞에서 풋, 하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웃음? 그랬다. 분명한 웃음 소리였다. 그는 곧 큭, 하고 터지더니 결국 소리를 참지 못 하는 듯 큰 소리로 변했다. 우스워 죽겠다는 듯한 소리였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반대편으로 다리를 꼬고는 맞은 편에서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이거, 옆나라 사신을 죽여서 돌려 보낼 수도 없고..."

"아, 큭, 웃다보니 주체가, 후, 안 되어서."

"까닭이 없는 결례는 흠일 뿐이지요."

 

 

소년은 그리 말을 던지면서도, 하나 변하지 않은 표정으로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의 말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웃음 소리는 잠시간 더 이어지다 잦아들었다. 그제서야 앞쪽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앞으로 걸어와, 그 앞에 놓인 소파에 기대어 멈추어 섰다. 제관을 걸친 소년은 그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역시 딱히 예를 갖추지 않았다.

 

 

"위대하신 폐하를 뵙습니다."

"이미 인사 치레는 건너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

 

 

무심하게 앞을 바라보던 소년이 그제서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빛에 비친, 검푸른 중절모. 무릎을 덮고도 남을 듯한 커다란 검은 코트. 금빛 장식이 달린 화려한 부츠와, 검은 장갑. 그 손에 쥐여진, 둥근 장식이 달린 검은 지팡이. 그리고, 언제까지나 소년일 것만 같은 얼굴. 그를 마주한 소년이 처음으로 눈을 크게 떴다.

 

 

"... ... 당신이 왜 여기에."

"말하지 않았나,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사신이라더니...... 빨리 돌아갈 방법을 스스로 포기하신 줄 알았습니다만."

"쓸데없는 소란은 피차 귀찮으니 제일 빠를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다. 확인할 것만 하면 그만이라."

 

 

그가 쓰고 있던 검푸른 베레모를 소파 위에 내려놓자, 모자의 빛만큼이나 검푸른 머리칼이 쏟아졌다. 그는 옷을 대강 정리하고는 벽난로 앞의 소파에 앉았다. 그는 쓸모없는 동작이라고는 없는, 손길 하나하나에까지 우아함이 스며든, 전형적인 귀족, 아니, 황족의 그것이었다. 소년은 붉은 빛에 반사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입을 먼저 연 것은 그였다.

 

 

"나와 얼굴이 같다더니 헛소문은 아니었구나."

"벌써 그곳에까지 퍼졌습니까."

"그대도 알고 있던 모양이군."

"단선의 새로운 황제에 대해 모르는 이도 있습니까. 이름 뿐이던 황제를 죽이고 결국 스스로 황위에 오른, 검은 곤룡포의 황제가 아닙니까."

"틀린 것이 하나 있으나 굳이 고쳐줄 필요는 없겠지. 이렇게나 똑똑한데 왜 하는 일은 죄다 그 꼴인가."

"시간이 많으신가보군요."

 

 

같은 목소리가 화음이라도 내는 듯 다른 톤으로 이어졌다. 그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소년 역시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된 이상 피할 수는 없으리라. 천천히 걸음을 뗀 소년이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소파 사이의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차는 이미 식었으리라. 아마 사용인이 미리 준비해둔 것이겠지. 그러나 소년은 그에 손을 댈 생각이 없었다.

 

이제서야 코앞으로 다가온 가까운 얼굴들이, 서로를 마주했다. 그러나 소년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그 눈에는, 빛이 없었다. 마치 소년이 아닌 것처럼.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이곳으로 직접 행차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작 얼굴이 같다던 이 하나를 보려고 오신 것은 아닐 테고."

"새장 속에 갇힌 새가 하나 있다 하여 구경을 하러 왔다."

"새장이라고요."

 

 

그는 말을 이으려다 문득,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신과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까지 똑같은 것을 보고는, 그는 부러 다른 다리를 꼬고 앉으며 자세를 고쳤다. 옆에 놓인 지팡이가 달그락 소리를 냈다. 소년은 그를 전부 알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새로 황제가 된 폭군을 보러 올 생각이었지."

"인사치고는 거하게 준비하셨군요."

"단순히 나의 나라를 위함이었네."

"직접 보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아. 폭군 따위가 아니라는 건 잘 알겠군."

"이 나라의 모든 이가 새로운 폭군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전대 황제를 죽이고 무력으로 자리에 오른, 자신의 편을 드는 귀족들까지도 거슬리면 단칼에 죽여버리는, 자비라고는 없어 오히려 전대 황제보다 못한 소년이라고. 그런데 폭군이 아니라고요."

"아니야. 궁 내의 사용인들 생각은 다르더구나. 언제나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지. 황제까지 된 이가 그런 가담항설에 휩쓸려서야 되겠느냐."

"... ...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그저...... 생각보다 훨씬 못 해서 말이네. 지금 보니 딱 그 꼴이군. 새장 속에 갇힌 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농을 하자는 게 아니야. 이미 그대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아. 그대가 얼마나 시들었는지."

"... ..."

 

 

소년이 잠시 말이 없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 그를 향했다. 그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 얼마 전까지 소년이 그러했듯이.

 

 

"폭군이 영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면 내 손으로라도 치워주려 왔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조만간 쓸려나가겠구나."

"... ..."

"애초에 그대는 왕이 될 만한 이는 아니군.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고."

"... ..."

"그런데 왜 여기 있느냐. 쓸려나가기 위해서인가?"

"... ... 예."

 

 

마지막 물음에 소년이 결국 입을 열었다. 눈앞의 치에게 더는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가 재미 있다는 듯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이 나라를 위해서인가?"

"비슷합니다."

"계획을 듣고 싶은데."

"말할 수 없습니다."

"더더욱 들어야겠다. 그러면 거래를 하나 하지."

"거래에 응한다 해서 제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당신은 당신의 나라를 위함이라 하지만 저는 곧 쓸려나갈 몸입니다."

 

 

소년은 옆나라의 황제를 눈앞에 두고도 눈 하나를 깜박이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소년의 배짱이 마음에 들었을까. 아니다, 그에게 특별한 백성은 없었다.

 

 

"그대는 쓸려나가기 위해서라 했네. 그렇다면 내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어. 당연한 일이지."

"... ..."

"그렇지만 그대가 원하는 것은 줄 수 있겠지. 나는 시간이 많다."

"... ...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왕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지."

"무엇을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소년의 말은 이어지지 않을지 언정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찻잔을 내려두며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소년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돌았다. 밤공기의 빛이었다.

 

 

"이렇게나 말이 쉽게 이어지는데 쓸려나가기를 결정했단 말인가. 내게 올 생각은 없느냐."

"농은 이미 끝내신 것으로 압니다."

"그리 말할 것 같았다만은...... 원하는 것을 말해보아라."

"원활한 관계를 원합니다, 전쟁은 피차 피하고 싶을 테니. 우리 쪽은 앞으로 쌓아가야 할 것이 많습니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지요. 그에 도움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앞으로의 관계를 위한 기회라."

"또한 그가 원활하게 이어지도록 도와주십시오."

"나를 앞에 두고도 퍽 가벼운 것을 원하는군."

"예, 제가 말할 것 역시 퍽 가벼운 것이니까."

 

 

그가 즐겁다는 듯이 한 번 더 웃었다. 말을 마친 소년의 눈에는 다시 죽은 빛이 감돌았다. 시들어버린 나뭇가지의 그것과 같은 빛이다.

 

 

"나쁘지 않아. 명이 짧아 그러한가."

"잊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받은 것은 잊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받아야겠지."

 

 

소년이 들고 있던 검을 내려두고는 그제서야 찻잔을 집어들었다. 그 바람에 소년이 쓰고 있던 왕관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으다. 소년은 부러 그를 집어들지 않았다. 애초에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제게는 미래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를 위해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 뿐입니다."

"이제야 좀 알겠군. 그대에게는 이미 황제가 있었어."

"예,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이 나라를 위한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을 너무 믿는 것 아닌가, 그대."

 

 

소년이 입가에 댄 찻잔을 바라보다 느리게 다시 테이블 위로 내려두었다. 역시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 궁 안의 그 어느 것도. 소년의 것이 될 수 없다. 소년은 그를 이미 암기한 채로 궁에 들어왔다. 소년이 붉은 빛을 받아 빛나는 차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럴 지도요."

"그대의 황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느냐. 단지 그 하나를 믿고 쓸려나가겠다는 것은, 계획이 아니라 오만이다."

"폭군은 원래 오만한 법입니다."

"말은 바로 하지. 그대가 폭군이라니, 주판이겠지."

 

 

그제서야 소년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이 미소를 감추지 않고는 그대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아주, 편안해보였다. 발치를 구르고 있는 제관 마냥.

 

 

"당신이 웃은 이유를 이제 좀 알겠습니다."

"농이 아니네만."

"압니다. 주판이니까."

"정말 농이 아닌데."

 

 

그의 말에 소년이 한 번 더 웃었다. 언제까지, 소년일 것만 같은 웃음이었다.

 

 

"주판이 폭군의 탈을 쓴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저는 아는 것을 계산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약속해달라 한 게 아닌가. 그 때면 그대는 죽고 없을 테니."

"그렇습니다. 다음 황제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은 그 뿐입니다."

"아쉽지 않느냐, 그대가 그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소년은 드물게 말이 없었다. 소년은 품에 안았던 이들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의 주군, 자신의 친우, 자신의 장미, 자신의... ... 그러나 소년은 새장에 갇힌 몸이었다. 심지어 스스로 새장 안으로 걸어들어와 문을 걸어잠근 몸이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 방법은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소모적이다.

그러니 소년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소년은 자신의 세상을 사랑했다. 정확히는 그 안으로 망설임 하나 없이 걸어들어와준 이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나라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소년은 기꺼이 나라를 죽여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들에게는 정당성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장을 부수는 것이 가장 간단했다. 가장 위험했고. 그럼에도 소년은 성공했고, 스스로 폭군이 되었으며, 덕분에 소년의 눈은 빛을 잃었다.

 

알고 있다. 다시 그들을 안아볼 일은 영영 없으리라는 걸. 마지막으로 욕심을 내어본다면, 얼굴을 보는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포기에 익숙한 소년은 언제나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새장에 갇힌 새는 다시 날아갈 수 없다. 새장을 열리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 ... 예."

 

 

그럼에도 아쉽지 않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소년은 그들이 무엇을 위해 이곳까지 오고 있는지를 알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나워야 했고, 아무것도 거들떠보지 않아야 했고,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야 했다.

 

무력으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이 때문에 소년의 계획 안에 자리했다. 나라가 어지럽다면 나라의 반대편에 선 이들은 더더욱 힘을 얻는다. 그러니 소년은 가장 효율적인 징검다리만을 건너, 이 자리를 자신의 황제에게 넘겨주기 위해, 단지 그것만을 위해 이 자리에 올랐다.

 

 

그러니 그의 손에 스러지는 것만이, 자신이 원해 온, 계산해 온 그 모든 것.

 

 

 

제 앞, 얼굴이 같은 이가 드물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소년은 그가 친히 주워준 제관을 한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가 문을 닫는 소리가 날 때까지,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 ... 무거웠다. 손에 든 것이.

 

 

 

 

*

 

 

 

 

소년은 드물게 새벽 일찍 일어났다.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를 밝히는 희미한 촛불 아래에서, 이미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던 것들을 또 한 번 살폈다. 도움이 될 만한 후작들, 자리에 오른 후 가장 먼저 쳐내야 할 세력들, 황궁에서 돌아가는 간단한 일과와 사용인들의 일과, 방의 위치와 숨겨진 비밀 통로, 또......

 

빠진 것은 없었다. 소년은 서류를 정리해 황제의 인장으로 봉했다. 탁자 위를 깔끔하게 치우고 서류를 올려둔 소년은, 뒤이어 침대를 정돈했다. 사용인들이 흔히 하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소년은 손수 방 안을 정돈했다. 애초에 소년의 물건이라고는 많지 않았으므로 그는 금방 끝이 났다.

 

 

 

소년은 불그스름해지는 수평선을 뒤로 하고, 거울 앞에 섰다. 평범한 옷을 걸친, 작은 소년이 비쳤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소년은 손등으로 눈가를 한참 훔쳤다. 그리고는 옷장에서 손수 하얀 옷을 꺼내 입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단조로운, 그리고 깔끔한 옷차림이었다.

 

그새 동이 트고 날이 밝았다. 소년이 옷차림을 정돈하며 거울 앞에 섰다. 따뜻한 아침 햇살에 비친 소년은, 궁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살아있는 이의 눈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 죽은 이는 죽음을 가질 수 없다.

 

 

"폐하."

"일어났습니다. 들어오시죠."

 

 

밖에서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망토를 걸치며 옷매무새를 한 번 더 가다듬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만큼 완벽해야했다. 안으로 들어온 사용인이 깜짝 놀라서는 자신이 하겠다 했으나, 소년은 그를 거절했다. 소년의 허리춤에는 검이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도, 소년은 여전히 불경하게 제관을 한 손으로 집어들어 아무렇게나 썼다. 소년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며 한 번 웃었다. 살아있는 이의 웃음이었다.

 

 

"이만 나가죠."

 

 

소년은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다녀가지 않은 것 마냥 깨끗했다.

 

 

 

 

 

 

21년도 4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