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PG COC 시나리오 '여름을 말려 심장에 꽂는 법', '그곳에 네가 있었다' 관련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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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암울한 소재, 자살에 관련된 심리 묘사
지독하게 쓴 꿈을 꾸었다. 그렇게 생각하고만 싶었다. 소년이 느리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차마 침대 밖으로 발을 디딜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발을 딛는 순간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다. 일어설 수 있게 손을 잡아달라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무엇으로, 그 어떤 권리가 있어 그리 할 수 있단 말인가. 소년이 희미하게 떨리는 손을 들어, 덮고 있던 이불을 한쪽으로 치웠다. 손의 떨림이 멎지를 않아 소년은 억지로 숨을 들이켜야 했다. 누군가 기도에 벽을 세운 것만 같았다. 숨구멍을 지나지도 못 하고 턱턱 걸리는 호흡이 까슬거리기만 했다. 숨이 막히도록 기침을 해 전부 토하고만 싶었다. 삼켜버린 이 생도, 숨도, 시간도.
이 모든 생은 처음부터 욕심으로만 채워져 있었음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소년이 생각했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도록 만들어진 생이라는 걸, 미리 깨달았어야 했다. 그러면 처음부터 그 모든 걸 욕심낼 필요도, 이유도 없었을 텐데. 아무리 제 욕심이 강하다 한들, 어디 누군가의 목숨을 깔고 앉아 배를 두드릴 배짱이 제게 있으려고. 그러니 그렇게 그냥 쥐죽은듯이, 살아 있음에만 만족할 수 있을 때, 그때 멈춰 서야만 했는데. 그런데 누가 제게서 그 나사를 빼갔나. 짙은 외로움이었나. 숨 막히는 고독이었나. 아니면 그토록 길고 길던, 잠 못 들어 삶이 빨아 먹히는 새벽이었나.
고작 혼자 시퍼렇게 지새우는 밤을 견디지 못 해 감히 타인을 앓으려 했다. 그 해가 뜨지 않는 수많은 밤에 미쳐, 스스로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갈 선택을 꺾어 들었다. 소년이 제 목을 틀어쥐었다. 숨이 가빴다. 멍청하게도 눈물이 났다. 단지 살고자 했던 삶에서 제가 꺾어 든 꽃이 하얀 국화였음을, 다시금 깨달은 이 숨이 너무도 죄스러워서. 살고 싶어 선택했던 순간의 이기심이, 그렇게 영영 너를 죽음으로 떨어뜨릴 줄 알았다면. 너는 단지 그곳에 있었을 뿐인데, 나 혼자만이 지독하게도 살고 싶어서 네게 손을 뻗었던 그 죄를, 이렇게 깨달을 줄 알았다면.
그리도 이기적인 선택을 했으니, 끝까지 이기적으로만 살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참으로 우스운 삶이었다. 살고 싶었다면 그저 그렇게, 네 손을 잡고 호흡만을 이어가며 살았으면 됐는데. 그렇게 찾아온 너는, 이기 따위의 단어와는 숨조차 섞지 않아서. 너는 단지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나를 선택했다. 너는 한 번도 허락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나는 높은 울타리를 쳐놓은 하나의 세상 안에서만 살았으나, 돌아보면 너는 어느새 그 안에 들어와 손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쫓아낼 틈도 없이 네가 쏟아붓는 황금빛 장마 아래에 온 생이 다 젖었다. 너는 끝도 없이 이기적인 내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다. 나는 그렇게, 이기적인 선택으로 내 앞에 있는 너를, 이타적으로 애정했다. 그렇게 온 생을 다해 살아가기만 하면, 사랑하기만 하면 될 줄로만 알았다. 그럴 줄만 알았다. 내가 무엇을 대가로 너를 선택해 내 삶을 연명해왔는지를 뻔히 알면서도.
소년이 결국 기침을 토해냈다. 숨을 들이켜지 못 해 쇳소리 비슷하게 이어지는 숨이 너무도 선명했다. 제가 그동안 잊고 있던 이기와는 달리. 그래, 네 이타를 품은 황금 장마에 온몸이 젖어서, 금빛 감기로 온 애정을 콜록이면서, 그저 그에 모든 게 젖어서. 그래서 그 모든 걸 잊어버렸던 걸지도. 그래서 너를 그렇게, 잃을 것을 알면서도, 안으려 한 것일지도. 단지 좋은 꿈을 꾸기 위해 너를 앓으려 한 건 아니지만서도.
소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목을 긁어내리며 웃었다. 그러니 이 숨은, 이 생은, 네가 남긴 벌이다. 아니, 그때 미쳐버려 내던진 제정신이 남긴 죄악이다. 제 생에 어떻게 용서가, 평안이, 긴 잠이 있으려고! 미친 소리지, 그러니 네가 그렇게 죽어버린 거다. 내가 그렇게 널 죽인 게다. 넌 그렇게도 날 살리고 싶어 했는데…… 숨도 쉬지 못 하는 주제에 웃기까지 하려니 목에서 풍선인형 같은 목소리만이 기어 나왔다. 미친 새끼, 겨우 뚫린 숨구멍이 얕았다. 허공을 더듬어 짚으려던 손이 당연하게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끌려 내려간 몸뚱이가 바닥을 기었다. 처절했다. 소년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처럼.
헐떡거리는 숨 사이로 드문드문 잿빛 빗소리가 들이쳤다. 소년이 점점 어지러워지는 시야로도 용케 흐린 하늘을 눈에 담았다. 이상하게도 비가 왔다. 네가 나를 찾아온 날에도 이렇게 비가 왔는데.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너는 언제나 이런 날에는 나를 혼자 두지 않았는데. 그런데 나는 너를 영영 혼자 남겨놓고, 이렇게. 소년의 웃음이 꼭 비에 먹히듯이 점점 흐려졌다. 울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이 빗소리에 섞여 흘러갔다. 비에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 더 없어 서러운 생이었다. 소년은 누구의 비명인지도 모를 것을 주워섬기며 누구의 이름인지도 모를 것을 내질렀다. 이제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으면서, 그저 온 시간을 다해 쥐어 짜내며 앓았다. 그것만이, 우리의 이별이 될 수 있다는 듯이.
그때, 그가 언제 이 집에 찾아왔을 때도 비가 왔다. 소년이 그의 이름을 감히 입에 담아, 그를 되돌려놓았던 일주일이 지났을 때. 소년은 비가 떨어져 생기는 파문처럼 둥그렇게 퍼져나가는 기억을 문질러 닦았다. 그래, 그 비를 다 맞아가며 집에 들어왔지. 꼭 우리의 첫날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그 빗속에서도 한 장 젖지 않은 책을 들고 왔다. 그는 그를 선물이라 불렀다. 포장을 벗겨 그 책이 무엇인지 확인한 소년은, 그에게 선물이라는 말의 뜻을 알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소년에게 그 시간은 지옥이자 죄악이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만났는데, 왜 이 세계를 이렇게 부유하고 있는데. 그 혼자만이 모르는 사실을 품에 넣고 시간 위를 떠돌던 소년은, 결국 그를 잃고 나서야 그 죗값을 치렀다. 너를 잃었던 그 잠깐의 시간이 미쳐버리고 싶도록 무서웠다. 소년은 제대로 된 시간을 일주일이나 보냈음에도 그때를 다시 생각하면 손이 떨리고 치가 떨렸다. 네가 잠시나마 나를 포기하는 선택을 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서. 내 이기로 너를 선택한 주제에, 버려지는 게 그렇게나 무서워서. 정작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배신하고, 고작 이기심 하나로 그의 시간 한 켠을 꿰찬 건 소년이었으면서도. 그렇게 이기적인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버려지는 게 지옥 같기만 해서.
그래서 네가 몸담을 밤하늘을 찾아 그리도 헤맸던 걸까. 네게 이런 밤하늘은 어울리지 않아서, 좀 더 반짝이는 자리를 찾아주려고. 그런데도 너는, 그 시절의 책을 들고, 다시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나에게. 소년은 느릿하게 표지를 쓸었다.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유서 같은 거 없어. 심장이 저 아래로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별은 생을 담을 수 있기에 우주보다 무겁다. 그래서 별이 떨어질 때는 그렇게도 슬픈 것이다. 제 감각 아래로 떨어지는 별의 꼬리를 바라보던 소년이 간신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런 말, 하지 마요. 그가 대답했다. 미안. 소년이 숨을 들이켰다. 다시 내뱉었다. 소년이 대답했다. 그래요.
그날, 그가 무어라 말했더라. 아, 그래. 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를 포기하지 않을게. 그냥, 그 세계에서 그랬다가 너를 울렸으니까. 그때 제 표정이 어땠더라. 울었나. 웃었나. 무어라 대답을 해주었던가. 아니면 그 모든 시간이 가시처럼 박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던가.
그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게다.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너를 포기해버렸는데, 너는 내게 걸려 넘어진 줄도 모르고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제가 적어도 일말의 양심이라는 게 있었더라면, 그때 너를 붙들고 한바탕 고해성사라도 늘어놓았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모든 걸 밝히고 네가 내리는 벌이라면 무엇이든 달게 받았어야 했다. 고작 그동안 너를 사랑한 시간 따위에, 너를 잃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너는 나를 위한다고 했는데, 나는 너를 위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쳐버린 걸까봐. 또다시 제가 모든 것을 죽여버리고 망쳤다는 선고를 받고, 이번에는 제가 죽어버리기라도 할까봐. 그래서 너를 놓쳐버리기라도 할까봐. 간신히 살고 싶어진 이 세상에서, 간신히 붙잡고 싶은 것이 생긴 이 삶에서, 네가 영영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까봐. 목숨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말이야. 그가 계속해서 속삭였고 소년은 죽고만 싶었다. 아니,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너를 놓쳐 버리니까.
그때,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너를 잡지 못 했다. 받은 말이 너무도 컸다. 네게 돌려줄 수 있는 무게가 없었다. 그는 그의 다짐이 얼마나 대단한 결심인지 모르리라고 했으나, 소년은 차라리 제가 죽고 싶어질 만큼 그를 잘 알았다. 제가 살고 싶어 너를 선택했는데, 그걸 모를까 봐. 살겠다는 결심 하나만으로 네 생은 그렇게 영영 씻겨나가버릴 텐데,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결심인지를 모를까봐. 나는 그렇게, 단지 내가 그곳에서 울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아가겠다고 대답하는 너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 멍청하게도, 어리게도, 아프게도.
바닥에 드러누워 빗소리를 콜록거리면서 소년이 생각했다. 그때 너를 잡았어야 했다. 그때 현관문을 열어제끼는 너를 붙들고,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도 된다고, 이번에는 네가 덮을 수 있는 이불을 사두었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리고 고해했어야 했다. 네가 내어준 말 하나에, 내 모든 후회로 이 생을 앓게 될 것임을 낱낱이 일러바쳤어야만 했다. 그렇게 네게 감사했어야 했다. 고맙다고 말했어야 했다. 단지 내가 살고 싶어 했기에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내가 되었다고, 그런데도 너는 그것까지도 사랑해주려 했다고, 그래서 마지막은 외롭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어야 했다. 빗속에 너를 그냥 보내지 말고, 너를 붙들고 그렇게 비를 막아주었어야 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무수히 많은 세계를 너와 지내며, 소년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우리의 이별은 지독하게도 길 것이다. 소년은 너와의 시간을 수첩에 적어 내려가던 그 순간부터 너를 앓을 준비를 했다. 이것은 사랑하기로 약속한 격통. 잃지 못 하겠다 저항한 흔적. 그러니 우리 사이의 이별은 길 것이다. 소년은 이미 그를 잘 알았다. 그러나 그 이별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 알았더라면. 그 이유가 단지 저 하나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너는 살아가겠다 말했으나 나는 이제야 죽고 싶어질 것을 알았더라면. 그게 빗소리 하나에 이렇게 숨이 막히는 이유가 될 것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따지고라도 싶었다. 혼자 견디기에는 너무도 긴 사랑이 아니냐고. 그런데 누구에게. 소년이 웃었다. 누구에게 따지지.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누구에게. 너는 없고, 나는 죽고 싶어졌고, 이 모든 개연성을 기쁘게도 제공한 신은 이미 없는데. 나는 누구에게 이 죄를 고해하고 벌을 받는단 말이냐. 신은 죽었고 저 빗소리는 지금도 이렇게 아우성치는데.
목을 긁어내리던 소년이 비척이며 바닥에 팔을 짚었다. 손목이 휘청이느라 몸이 한 번 꺾였다. 바닥을 온몸으로 쓸어내리다시피 한 소년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다리가 후들거리며 움직였다. 너를 되찾아야겠다. 내 모든 생을, 기억을, 기회를, 이별을, 사랑을 걸어서라도. 그렇게라도 속죄할 수 있다면 그리 해야겠다. 나는 너를 애정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 이별을 납득할 수는 없다. 너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렇게 나를 혼자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네가 정말로, 진심으로 내가 혼자 우는 꼴을 못 보겠어서 살고 싶다고 했다면. 네가 정말로, 정말로, 나를 곁에 둘 사람 비슷한 것으로, 단 한 번이라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면. 네가 한 번이라도 내 세상에 그렇게도 멋대로 발을 들였다면. 너는 이렇게 쉽게 죽음을 납득해서는 안 된다.
덜덜 떨리는 소년의 손이 책장을 더듬었다. 그의 손 끝에 걸린 책 한 권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정신없이 종이를 넘기던 소년의 손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소년의 떨리는 손 끝에서 단어 하나가 걸려 너른 춤을 추었다.
여름이었다.
*
소년은 책의 포장지를 뜯었다. 겉을 감싼 비닐의 모서리를 잡아 뜯는 손길이 퍽 익숙해 보였다. 포장을 다 벗긴 책에서는 새것의 냄새가 났다. 새 책 냄새 나네. 소년이 표지를 손 끝으로 느리게 쓸어내렸다. 오돌토돌한 면이 소년의 손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목은 여름날의 너. 요즘 인기가 많다는 베스트셀러였다. 소년이 다시 고민했다. 이걸 주면 네가 읽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도서관 갔을 때 또 베고 자고 있는 거 아닐까? 아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 이거 모의고사에 나올 수도 있다던데, 그냥 좀 읽어보면 안 되나? 엄청 당신 같은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온다고 하면 볼까? 소년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다, 이미 산 건데. 소년은 제 몫으로 산 책을 책장의 빈 곳에 꽂았다. 나는 이미 다 봤는데, 참 당신 같은 사람이 나와서 당신 것도 샀다, 이미 샀으니까 봐줘야겠다, 그렇게 얘기하면 들은 척이라도 하겠지. 소년은 독서를 좋아했으니 많은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독서가 아니라 소년이 좋아서 도서관에 머무른다는 것은 아직도 몰랐다.
소년은 그를 나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처음부터 소년을 알던 것처럼 굴었고, 이상하게 소년도 그를 처음부터 알던 사람처럼 대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당신 이거 좋아하죠?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어라, ……그러네, 어떻게 알지, 그, 그냥 느낌? 묘한 일은 많았다. 이 영화 재미있어요. 알아, 너 그거 보다가 울었잖아. 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엥, 맞네, 왜 알지? 누구한테 들었을걸, 아마? 그러나 서로가 묘하지는 않아서 관계는 이어졌다. 소년은 누군가를 쉽게 허락하는 일이 없었고 그도 그러했으나, 이상하리만큼 예외는 손쉽게 생겼다.
어느 날 소년이 밤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말을 건 적이 있었다. 북극성이 환하게도 뜬 밤이었다. 옆에 있던 그가 눈을 뜨는 기척이 느껴졌다.
"있죠,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 아직도 왜 당신이 날 받아들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갑자기 뭔 소리냐."
"당신은 안 그래요? 그냥 우리는 처음부터, 모든 게 다 당연했던 것만 같아서…… 그냥 돌아보니까 거기에 당신이 있어서. 당신은 대체 왜 그랬나, 하구.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날 이해하려고 했는지, 그때 날 붙잡았는지, 아는 척을 했는지 궁금해서."
소년이 북극성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 그 옆의 별. 떨어진다. 옆에서 그의 대답이 들렸다.
"사람 보는 눈이 좀 생겨서 그렇다고 하면 믿을래?"
"믿겠어요?"
"저럴 줄 알았다. 뭐…… 네가 마냥 다정하지만은 않아서. 그런데도 다정을 잃지 않아서. 그래서 좋은 거지.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내 이기심일지도 모르고."
"……네?"
"근데 이거 전에도 말하지 않았냐?"
밤하늘이 아득했다. 어쩐지 저 깊은 밤하늘, 우주의 한가운데에 첨벙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빛나는 별이 소년을 둘러싸고 그 가운데에 갇혀 몇 번이고 너를 만나고, 그 모든 세계에서 네 곁을 지키려 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몇 번이고 네게 이 질문을 던지고, 너는 몇 번이고 그 대답을 내게 이미 준 것만 같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 너무도 아득해 셀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득해지는 눈앞에 소년이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전에, 언제요?"
당신 그 얘기 나한테 처음 하는데. 저편에서 별이 하나 더 떨어졌다. 소년은 그 뒤로 다시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런 때도 있었지."
소년이 책상 위의 책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참 이상했다. 모든 것은 당연했으나 너는 당연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았으나 네가 그곳에 있다는 그 하나만은 분명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애정했다. 참 이상하지, 우리의 이해만 없다면 모든 것은 그저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뿐인데. 마치 긴 시간을 이미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이해했다. 받아들였다. 이유는 그곳에 그저 네가 있었다는, 그 하나가 다였다.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소년이 창문을 향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여전히 빗소리가 들렸다. 비가 아직도 오네. 책 가져다주러 가야 하는데. 날씨가 돌았나? 소년이 문득 든 생각을 입 밖으로 뱉으려다 고개만 한 번 기울였다. 무슨 이런 생각을 한담. 어제 그와 좀 오래 있었더니 그의 말씨가 덩달아 입에 붙은 모양이었다. 소년이 고개를 집어넣고는 비에 젖지 않도록 도로 책을 포장했다.
꼼꼼히도 포장한 책을 챙기고, 현관으로 나와 신발을 신은 소년이 문득 멈추어 섰다. 밖에서 저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이상하게도 우산을 챙겨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상하네, 비 맞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데. 소년은 그와는 다르게 비를 맞고 감기에 걸리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우산을 잃어버려 걸리지도 않는다는 여름 감기를 독하게 앓은 뒤로는, 못 해도 집에 우산이 두세 개는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하나도 보이지가 않을까. 우산을 챙겨 가지 말라는 것처럼.
소년은 문득, 그가 비에 젖은 채로 현관에 들어서던 날을 떠올렸다. ……어라, 그런 날이 있었나. 언제였지. 모르겠다. 분명히 그날 일 때문에 그에게도 맞는 크기의 이불을 새로 샀는데. 그런데 그게 언제더라. 그는 아직 소년의 집 주소도 제대로 모르는데. 다시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에 소년이 고개만 한 번 저었다. 가서 물어보면 되겠지. ……그런데 무엇을? 무얼 물어보려고 했더라?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발을 도로 신고는 짐을 챙겼다.
소년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빗물을 받던 소년이 생각했다. 오늘은 내가 선물을 줄 수 있겠네.
소년이 빗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빠르지 않았다. 소년은 도착할 곳을 이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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