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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국내]/서씨들

도망치지 못 하고 잔존하는 것의 새벽

by CAGAMINE LANJIE 2023. 7. 8.

 

 

§ 개쩌는 로그에서 이어집니다 https://nightwhale-incomplete.postype.com/post/13527491

§ 주의: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소중한 사람의 죽음, 정신 붕괴, 우울함에 대한 심리 묘사, 폭언, 폭력, 괴롭힘과 비인간적인 대우에 대한 설명 등

§ 제휘야 너는 갓캐란다 이 시대의 빛과 소금

§ 전체적으로 우울한 글 주의. 퇴고 크게 없음, 비문 주의.

 

 

 

 

 

 

 

 

 

 

그러니까 소년은,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모든 진실은 시간을 기반으로 한다. 받아들여지기까지, 이해받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진실이라는 것들은 흔히, 그만한 파문을 몰고 오는 일이 잦으니 당연하게도.

 

소년은 그래서, 언제나, 그런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도망치고만 싶었다. 소년의 삶의 자취에는 그런 도망의 흔적이 가득했다. 가끔 그를 때려치운 흔적, 중단한 흔적, 죽여버린 흔적 등이 진하게 남아 그 말미를 장식했다.

 

하지만 소년은 알고 있었다. 그것만이 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부대장, 그래서 여기로는⋯⋯"

"⋯⋯."

"부대장?"

"⋯⋯."

"태훈아?"

"⋯⋯."

"야, 서태훈!"

"어, 어? 네?"

 

 

소년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앞에 팔짱을 끼고 선 부대원 하나가 소년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참. 지금 회의 시간이었지. 소년이 민망한 얼굴로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회의 시간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벌써 세 번이나 불렀다고요!"

"아, 미, 미안해요, 다른 생각을 좀, 하, 하하⋯⋯ 우리 무슨 얘기하고 있었지?"

"식량 조달 루트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여기로는 못 가겠다고 얘기하던 중이에요. 정신 차립시다, 우리?"

"네에, 정신 차립시다아⋯⋯"

 

 

소년이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종이의 하얀 것보다 검은 것에 집중하기 시작한 소년의 눈이 다시 이채를 되찾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치 그를 원하는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 집중은 채 사흘도 가지 않았다.

 

 

"부대장."

"네, 듣고 있어요."

"요새 뭐 숨기는 거 있어요? 비밀 생겼어요? 아니, 뭐, 부대장이야 원래 비밀이 많기는 한데⋯⋯."

"어⋯⋯ 아뇨, 딱히? 내가 숨길 게 뭐가 있어요."

"그래요? 그럼 왜 자꾸 폴라리스 부대 대장한테 화내요?"

"⋯⋯어, 내가?"

"네! 그거 화낸 거 아니에요?"

"내가⋯⋯ 화를, 낸다고요?"

"네에, 같이 얘기하다 말고 울컥해서 잔뜩 노려보지를 않나, 그러다가 그냥 가버리지를 않나. 평소 같았으면 등짝 때리면서 막 뭐라고 하셨을 거잖아요? 말만 잘한다면서 아프지도 않을 사람 찰싹찰싹 때리고? 근데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말이 없어진다? 이건 화났다는 거죠."

"⋯⋯."

 

 

소년은 무어라 대답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더 이상하게 생각할까, 어찌저찌 뭐라도 대답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으나, 이번에도 머지않아 도로 닫혔다. 소년은, 그러니까, 애꿎은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애써 갈무리해 넣어 두었던 속마음이 불쑥 튀어 나갔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잖아요?"

 

 

얼마 뒤, 소년의 막사를 열고 들어간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오는 일이 벌어졌다.

 

소년은 며칠 전에 일거리를 한아름 안아 들고 막사에 틀어박혔다. 남긴 말은, 안으로 들어오지 말고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 뒤로 소년의 막사는 기이하리만치 조용해졌다. 심지어 소년은 밖으로 한 번 나오지도 않았다. 식사를 찾는 일도, 누군가를 부르는 일도, 처리된 서류를 들고나오는 일도 없었다. 결국 이를 이상하게 여긴 아이 하나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락도 없이 막사를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펜을 든 채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소년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사람이 들어왔다가 도로 뛰쳐나갔는데도, 듣지 못 하고 보지 못 한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을 자지 않은 건지, 너무 오래 잔 건지, 알 수도 없게 눈 아래에는 시커먼 자국만이 남았고 눈은 잔뜩 충혈된 채였다. 주변에는 손도 대지 않은 서류만이 널브러져 있었고, 손에 들린 펜은 잉크조차 제대로 충전되지 않은 것 같았다.

 

비명을 듣고 튀어나온 이들이 자초지종을 설명한 아이와 같이 소년의 막사로 향했을 때는, 이미 소년은 자리를 비운 뒤였다. 한참 뒤에야 소년은 세수를 하고 온 듯 물을 뚝뚝 흘리며 돌아왔다. 여전히 새빨간 눈으로 소년이 대답했다. 숨기는 거 없어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식사는 싫어요. 네, 싫다고요. 싫어요.

 

 

 

그러고 얼마 뒤, 소년은 혼자 남은 막사 안에서 서류를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주르륵 떨어지는 느낌이 들기에 코피가 터졌나 싶었다. 콧등을 누르는데 딱히 아프지 않았다. 제대로 피곤해졌나 보네, 닷새 넘게 그렇게 보내고 사흘 철야는 무리였을까.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던 소년이 툭, 툭 떨어지는 액체를 확인하고는 눈을 몇 번 끔박였다. 그 바람에 눈썹 끝에 달려 있던 눈물 방울이 다시 서류 위로 뚝뚝 떨어졌다. 붉지 않네. 피가 아니었다. 소년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코를 막으려던 천 자락은 그대로 눈가로 향했다. 소년은 급하지 않게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곧 손길이 천천히 멎었다. 소년이 느릿하게 앞으로 엎어졌다. 소리조차 없이 소년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래, 소년은 언제나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그저, 그리 할 수 없었을 뿐.

 

 

 

 

 

*

 

 

 

 

 

나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이별 편지만을 네게 보내고 싶었다.

 

 

 

 

 

*

 

 

 

 

 

어느 날의 소년이 막사의 천을 느릿하게 걷어 올리며 밖으로 걸음했다.

 

밤하늘에는 꼭 넘쳐흐를 듯이 가득히 담긴 별이 그 궤도를 따라 유유히 움직이고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익숙한 별과 시선을 마주했다. 별이 많이 떴네. 내일은 날이 맑겠어. 이별을 말하기 좋은 날씨다.

 

소년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별이 떨어지듯 느리게 움직인 시선이, 저 끝의 별에 가 박혔다. 그러니까, 소년의, 그들의 별에.

 

 

"⋯⋯."

 

 

소년이 그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모두가 잠에 들어 고요하기만 한 시각, 현실과 망상의 끝자락 중 어떤 것을 부여잡아야 할지 내내 고민하며 초침을 지새워야 하는 그즈음, 그를 지키듯이 걸터앉은 등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경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모든 것을 경계하며 혼자만의 길을 찾으려 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년은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그렇게 응시하기만 했다. 어쩌면 이미 눈치챘을까, 소년의 숨소리를. 하지만 지금 굳이 소년을 부름 하지 않는 것은, 아니, 그 지난 내도록 소년을 말리다 결국 놓아둔 것은, 그 역시 알기에 그러했을 테다. 소년에게는 소년만의 시간이, 그러니까,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소년이 그 모든 이해로 호흡하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채 서른 걸음도 되지 않을 거리가, 삼 년은 있어야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먼 것 같았다. 소년은 그 삼 년을 서러움만으로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이미 지난 며칠이 삼 년보다 더 짙었다.

 

그렇게 삼 년을 걸음한 소년이, 이윽고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생명의 소리를 흘리며 피어 있었다. 아주 예전의 그 어느 날처럼 붉은, 불이.

 

 

"⋯⋯."

"⋯⋯."

 

 

그는 꼭 소년의 기척을 파악하지 못 한 것처럼 굴었다. 소년은 굳이 그를 지적해 스스로를 상처 내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한동안 둘 사이에는 익숙하고도 낯선 침묵만이 자리했다. 익숙한 옆모습에서 괜찮냐, 라는 말이 들려올 법도 했다. 평소의 그들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터였다. 그러나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붉게 피어나는 불꽃만을 계속 응시했다. 곧 이어질, 아주 서러운, 이별을 사랑하는 것만 같이. 그 아픔을 품은 소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요."

"⋯⋯."

 

 

그 한 마디부터가 힘이 들었다. 소년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감내해왔던 모든 시간을 풀어내듯이 숨을 크게 뱉었다. 고작 하나의 호흡이, 어떠한 결심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소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잠시, 그가 눈빛으로 그만하라고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그것이 착각인지 현실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 현기증이 일어 시야가 어지럽다. 꿈이 아니네. 소년이 말을 이어갔다.

 

 

"가족이 있었어요. 부모님과 형이 있었죠. 친하게 지내는 친척들도 있었어요. 고모랑 고모부, 나랑 나이가 비슷한 사촌들도 셋 있었고요."

"⋯⋯."

"그때까지만 해도 되게 말썽꾸러기였어요. 사고도 치고, 시끄럽게 떠들기도 하고, 나서기를 좋아했죠."

"네가 시끄러웠다고? 상상이 안 가네."

"그때는, 그때는⋯⋯"

 

 

소년이 목소리를 쥐어짜듯이 말을 마쳤다. 부모님들이 전부 살아 계실 때였거든요. 말을 마치자마자 소년이 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소년의 몸이 뒤로 기우는 것을, 그가 팔을 뻗어 익숙하게 받쳐 들었다. 소년이 애써 그의 팔을 밀어내며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괜찮아요, 괜찮, 콜록, 괜찮아요."

"그만 들어가라. 아직 밤에는 공기가 쌀쌀해."

"괜찮아요. 언젠가는 내가⋯⋯ 결국 내가,"

 

 

당신에게 쥐여주어야만 하는 말이니까. 지난 저주를 씹어 삼키듯이 중얼거린 소년이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답잖게 그 어떠한 설명도 내어주지 않았다. 소년의 상태가 좋지 않아 소년을 다시 안으로 들이려던 그의 손은 번번이 가로막혔다. 결국 그는 무언가를 포기한 것처럼, 혹은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손을 거두었다. 뒤로 몇 번 더 넘어가려던, 내지 앞으로 몇 번 고꾸라지려던 소년을 지탱하듯이, 그저 팔을 소년의 등 뒤에 놓은 것이 다였다.

 

그렇게 막연히, 다짜고짜 아주 어릴 적의 일로 시작된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예요. 지금은 좀 많이 없어졌죠, 다른 상처가 날 일이 많았으니까요."

"⋯⋯미리 알았으면 그놈들을 좀 찢어 죽여 놓는 건데."

"흐, 지난 일이잖아요, 전부 지난⋯⋯ 우욱."

 

 

어떻게든 웃음을 지으려 애쓰던 소년이 결국 입을 막고는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어떤 것도 흘려보내지 못 한 소년은 대신 속을 흘려보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가 말없이 소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쩐지 그 얘기는 좀 말리고 싶더라니. 그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소년이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은 단연코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를 오래도록 생각해 온 이나 누군가에게 정돈된 말로 한 번 내놓은 적이 있는 이라면, 이렇게까지 거부 반응을 보일 리가 없다. 그는 이런 면에 대해서는 뼈아프게 이해가 빨랐다. 그 역시 오래도록 그런 길을 걸어왔기에.

 

 

한동안 입을 가리고 소리를 막으며 헛구역질을 하던 소년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입을 틀어막은 손을 떼어냈다. 이제 소년은 괜찮다는 말도 하기 힘든 듯 보였다. 그를 대신하듯 소년이 그의 팔에 나머지 멀쩡한 손을 얹었다. 바람이 스치는 것 같은 작은 밀어냄이 일었으나 그는 꼭 그 바람을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손을 떼어냈다.

 

소년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새 소년의 얼굴이 축축해졌다. 생리적인 반응 때문인지, 잊으려 하던 것을 굳이 꺼내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소년은 울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후로 내내 무표정한 낯이던 소년이 역시나 덤덤하게 팔을 들어 소매로 그를 닦아냈다. 꼭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눈물이 흘렀다는 것처럼. 그리고 이야기가 이어졌다.

 

 

소년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묘사하는 단어들은 퍽 잔인했다. 그리고 소년은 그 이야기를 서술해 내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듯이 보였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한 번 꺼낸 일이 없는 것처럼, 소년은 이따금 기억 속의 차례를 더듬기 위해 말을 멈추고는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음절을 고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예 이 이야기를, 처음 만들어 내는 사람처럼. 그는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었기에 소년을 부러 재촉하지 않았다. 소년도 구태여 그를 고마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됐는데, 거기 생활도 순탄치는 않았어요. 가만히 있으면 괴롭히고, 헛소문도 내고, 말도 부풀리고, 시비도 걸고⋯⋯ 하지만 굳이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헛소문을 수정해주고 싶지도 않았고. 결국 얽히면 똑같은 사람이 되잖아요."

"그럼 그냥 패죽이지 그랬냐?"

"아, 그럴걸 그랬나. 그러면 조용해졌으려나. 그런데 어차피, 어차피⋯⋯ 똑같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후우⋯⋯ 거기서, 거기, 서⋯⋯ 교사 하나가 저를, 불렀는데⋯⋯ 그런데 그 새끼가, 하, 저를 끌고 어디로, 가더라고요. 조용히 지내니까 만만했나 보지, 없어져도⋯⋯ 누구 하나 모를 것, 같았나 봐. 거기가, 거기가⋯⋯"

"⋯⋯."

"실험실. 실험실⋯⋯이었어요. 에스퍼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실험실."

 

 

그리고 소년이 말을 마치자마자 기절했다. 구현해 낸 단어는 무엇 하나 잔인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그는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덤덤한 손길로, 그는 늘어진 소년을 받쳐 안았다. 모닥불에 비친 소년의 얼굴이 온통 물기로 가득했다. 그 바람에 얼굴로 향한 빛이 번들거리며 난반으로 이지러졌다. 그 아래에 자리한 손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희미하게 떨림을 품었다.

 

그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가 먼저 부재를 고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마주할 일이 없었을, 비참한 깨어짐을 목도했다. 어떤 것은 이별을 약속하고서야, 끌어안은 시간을 포기할 것을 맹세하고서야 피어난다. 비록 더 없을 참담함을 양분으로 삼더라도. 어쩌면 그가 공백을 예고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같은 일은, 아니, 지난 몇 주 같은 일은 없었을 테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그저 낭비하지만은 않겠다고, 이미 소년과 약속을 마쳤다. 그런 이상은 도망칠 수 없었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그리하여 그는 소년을 이해했다. 그 역시 아주 오랜 고민과 아주 오랜 시간을 건너서야 소년에게 부재를 고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소년의 답은 도피가 아니라 대면이다. 꼬깃꼬깃하게도 접어 속에 홀로 고이 안고만 있던 죽음을, 최초의 솔직함으로 소년에게 꺼내놓은 것에 대한 답이다. 그는 이토록 소년이 억지로 답을 꺼내 놓으려 하는 이유를, 답을 내보이기까지 있었을 고심을 이해했다. 그 역시 이미 과거를 한 번 잊은 일이 있었으니까. 덮어놓았던 것을 다시 제 손으로 들추어내는 동안 사람이 어디까지 죽음을 원할 수 있게 되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면 얼마든지 기다렸을 텐데. 하지만 너는 그런 걸 요구하는 사람으로 그곳에 서 있었던 게 아니지. 그는 소년을 응시하던 시선을 느직하게 떼어냈다. 지금 생각해보았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소년 역시 그가 어떠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기에 그곳에 서 있었으므로.

 

그는 소년을 다시 자리에 눕혀두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

"⋯⋯."

"⋯⋯서태훈."

"⋯⋯."

"⋯⋯."

"⋯⋯어디까지, 얘기했죠?"

"⋯⋯."

"어디까지, ⋯⋯얘기했냐고."

"⋯⋯끌려간 곳이 실험실이었다는 얘기까지."

 

 

소년이 휘청거리면서도 용케 그의 품을 벗어나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소년이 자리에 앉기까지는 퍽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그는 더 이상 소년을 말리지 않았다. 그 시간을 감내한 소년이 더듬더듬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다행히 그 뒤로는 그 또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이야기였기에 말을 마치는 데까지 아주 깊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몇 가지 더,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야기가 이어지더니, 소년이 느리게 말을 맺었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

"⋯⋯왜, 안 물어봐요? 아무것도."

 

 

갑자기 묻지도 않고 옆에 앉아서 내내 혼자만의 얘기로만 시간을 태웠는데, 이 새벽이 다 갈 동안. 소년의 다갈색 머리가 사그라들기 시작하는 모닥불의 빛을 받아 태워질 듯이 빛났다. 소년은 굳이 그 뒤까지 전부 읊어 물음하지는 않았다. 왜 자신이 주섬주섬 예전 이야기를 꺼내놓기로 했는지를 알아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소년이 한참을 헤매며 보내고 부정하고 도망치고 울고 회피하고 화내고 비난하고 웃어넘기고 다른 꿈을 꾸었음을 알기 때문인 건지. 그가 불완전한 질문에 온전히 답했다.

 

 

"이게 네 대답인 걸 알 것 같아서."

"⋯⋯알 것, 같다고요?"

"뭐, 모를 수가 없잖냐. 내가 이미 말해버린 건데."

"내가⋯⋯ 내가 얼마나 비참하게, 내린 대답인지도⋯⋯ 알고 있, 어요?"

 

 

그래, 소년은 비참했다. 그를 만난 이후로 언제나 그랬다. 그는 소년에게 가끔 잔인할 때가 있었고 소년은 이미 그가 한차례 비집고 들어온 세상에서 굳이 그를 내쫓을 의향이 없었기에 모든 것을 기어이 감내했다.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네가 건넨 그 상처까지도 사랑한다는 것. 그리하여 소년은 그를 제법 비참하게 사랑했다.

 

하지만 그 부재까지도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없었잖아. 소년은 아주 늦지 않은 시일 내로 발생할 공백을 알게 된 이후로 더욱 비참해졌다. 그가 건넨 부재는 오로지 소년만의 것이었다.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사랑하기로 한 이별에 속한, 그러나 이별에는 무엇보다도 취약한 소년의 것이었다.

 

 

소년은 이를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언제나 강한 이였고, 무엇보다도 밝은 이였으므로. 비록 그것이 자신을 소모해 발하는 빛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그가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그러니 그가 죽음을 건네준다는 것은, 그의 가장 깊은 밑바닥을 드러낸다는 것. 그의 가장 큰 약점을 기꺼이 쥐여준다는 것. 밝힐 수 없을 그 모든 선을 내려놓고 오롯이 소년에게 솔직하겠다 고백하는, 최후의 선까지 달게도 물러난다는 것. 그를 이해했기에 소년은 누구에게도 그 상처를 털어놓지 못 한 채로 오롯하게 혼자 그 앓음을 견뎠다.

 

그러나 그 깊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소년은 그 열을 어떠한 정의로도 재단하지 못 했다. 그를 이해하지도, 삼키지도, 용서하지도, 애정하지도, 부수지도 못 했다. 그저 그 앓음을 안은 채로, 어찌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을 받은 채로, 그저 그가 건네준 것에 대한 답 하나만을 억지로 찾아들고서 그에게 왔을 뿐. 지난 그 모든 비참함과, 애정과, 슬픔과, 서러움과, 웃음과, 외로움과, 이해와, 공존을 안고서.

 

소년은 어찌 되었든 그 열을 안아 들고, 과정은 어떻게 손조차 대지 못 한 채로, 결과만을 더듬더듬 읽어냈다. 그것만은 가능했다. 그가 언젠가는 반드시, 부재할 것임을 깨닫는 것. 그 시기가 단지 조금 이를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 것. 그 부재가 남길 온갖 화상들은 감당할 수 없었으나, 그 사실만은 긴 새벽을 들여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남은 무너짐은 오롯이 소년의 것이었고 소년은 사랑하기로 약속한 격통을 굳이 넘길 생각이 없었다.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최초의 이별에, 기어코 비참하게 산산조각 나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

"⋯⋯."

"다 그렇잖냐. 인간의 밑바닥이라는 건 다 비참한 거니까."

 

 

그리하여 이것이, 소년의 그 비참한 대답이었다. 이것이 소년의 가장 깊은 밑바닥, 소년의 가장 큰 약점, 밝힐 수 없을 그 모든 선을 내려놓고 오롯이 그에게 솔직하겠다 고백하는, 최후의 선까지 달게도 물러나는 것. 소년이 그 누구에게도 한 번 고백하지 않았던 것을, 그에게 대답으로 쥐여주었다. 자신조차 한 번 뒤집어엎어 마주 보며 정리한 것이 없는 시간. 부재를 인정하고서야 겨우, 먼지를 털어 억지로 끄집어낸, 한 번도 묘사한 일이 없는 자신의 밑바닥.

 

소년은 이유조차 없이 그의 죽음을 건네받았다. 그의 밑바닥을 본 이상은,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이상은, 그의 가장 큰 약점을 스스로 꺼내게 만든 이상은, 자신도 그리해야만 했다. 철저하게 밑바닥까지 떨어져서, 그가 묻지 않았듯이 질문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을 스스로 꺼내 놓아야만 했다. 홀로 보내야 했던 그 기나긴 새벽 끝자락에서 억지로 집어삼키기만 했던 그 시간들을, 한 번도 타인에게 꺼내어 준 일이 없던 그것들을, 다시 마주해야만 했다. 이것이 정말 마지막이라면. 그의 밑바닥을 당당하게 마주보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는 그런 소년을, 이해했다. 이유조차 없이. 그저 그들이 그곳에, 모닥불을 마주하고, 있었기에.

 

 

소년이 그새 다시 축축해진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모든 것을 놓은 듯이 후련해 보이기도 했고, 모든 것에게 버려진 듯이 서러워 보이기도 했고, 모든 것에 신물이 난 듯 초췌해 보이기도 했다. 소년은 언제나 존재해 왔던 애정을 읊듯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가끔, 나한테 너무 잔인하게 군다고 했었죠."

"그랬지. 나는 그게 가끔이라 다행이라고 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내가 기억하는 한 당신은 항상 잔인했어."

"그랬냐. 뭐, 네가 너무 편했나 보지."

"그랬나 봐.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당신에게 쥐여줬던 걸지도."

 

 

그래서 나까지도 당신에게 너무 익숙해졌던 걸지도. 그래서 당신이 내는 그 모든 상처가 그저, 사랑스러웠던 걸지도. 그렇게 지새우는 시간마저도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걸지도. 소년의 눈이 텅 빈 빛을 내었다. 그는 언제나 소년의 눈 안에 별이 들어차 있다고 믿었으나, 아니, 소년은 단지 그의 눈을 마주 보았을 뿐이다. 그의 눈에 담긴 별빛이, 소년의 거울 같은 눈에도 잠시 발을 담갔을 뿐. 소년은 한 번도 눈에 별을 품은 일이 없었다. 그저 흐린, 촛불처럼 가녀린 빛만을 더듬고 다듬어 그 형태를 담았을 뿐. 그는 그것이 소년의 빛인 줄 알았을 뿐이다. 문득 그가 물었다.

 

 

"후회하냐?"

 

 

우리의 그 모든 시간을 알았던 걸, 우리로 존재하던 그 시간을 안았던 걸, 후회해? 그 격통은 그렇게까지 잔인한가? 내가 네게 너무 많은 것을 남겼나? 그걸 다시 거두어 가지는 않을 거지만, 그를 담기 위해서는 네 이해가 지나치게 깊어야만 하나? 내가 내어준 것은 그저 네가 이해할, 나의 욕심인가? 소년은 단 네 음절의 의미를 모조리 이해했다. 소년이 웃었다. 아니, 운 것만 같았다.

 

 

"⋯⋯후회, 할 만큼, 사랑하죠."

 

 

말했잖아, 나는 언제나 당신에게, 가장 소박한 이별 편지만을 보내고 싶었다고. 반드시 사라질 이에게 그 모든 시간과 이해를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고. 그저 내가 전부 다, 안고 가고 싶었다고. 그 무게 하나로 산산조각 나버려 다시는 일어서지 못 하게 되는 한이 있어도. 이유조차 없이.

 

후회하지도 못 할 만큼 잔인하게, 당신이 그때 그곳에 있었잖아. 지난 시간은 그렇게 가치를 품었잖아. 우리는 그렇게 질문 하나조차 없이 단조로이 공백으로 서로를 이해하기로 했잖아. 그러니 나를 산산이 부술 이 격통은, 마침내 당신이 남긴, 그리고 남길, 그 시간과도 같은지라.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기어이, 내가 사랑해야 할 것, 이라고.

 

 

장작이 전부 타들어 간 후에야 비로소 소년은 이별을 이해했다. 그가 공백만을 남기고 간 자리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삶을 받아들였다. 그 후에는 그가 남기고 떠날 모든 이해로 온전히 호흡해야 할 것을, 그것이 소년의 삶이 될 것을 이해했다. 그 누구에게도 더는 털어놓을 수 없을, 그와 소년 사이의 비밀이 생겼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서러웠다. 결국, 결국 우는구나. 내가 당신을 만나고서. 다정하고자 했던 모든 것에 대한 반영으로, 마침내 공백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서.

 

 

 

호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닥불이 여전히 밝게도 타올랐다. 저 너머에서 아주 느리게, 그러나 거부할 수 없게 해가 밝아오는데도, 여전히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은 채였다. 꼭, 비가 내리는 소리로 그 누구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았다.

 

그가 소년의 등을 토닥였다. 소년이 울음 속에서도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딱 일 분만요. 그가 대답했다. 그래.

어차피 소년이 얼마의 시간을 부르더라도 그가 남길 시간보다는 짧을 터였다.

 

 

 

그리하여 소년은, 이번에도 도망치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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