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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기타]/글챌린지 50(19.07~)

십사일의 금요일

by CAGAMINE LANJIE 2021. 5. 25.

 

 

 

- 글 챌린지 50 :: No. 14. 연인의 사랑스러운 점.

- 한빛나님 2000일 기념 로그.

- 7800자 정도.

 

 

 

 

 

 

 

"그럼 한빛아, 너는 식물을 키워보는 건 어때?"

 

 

서한빛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다. 거의 연을 끊다시피 했으니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촌 형은 한 명, 사촌 동생은 둘이 있다. 남은 친족이 없었으니 그들 다섯이 결국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장맛비 안에서 같은 우산을 자주 쓰고는 했다.

그는 남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은 대신 사촌들과 사이가 좋았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가끔 사촌들 집에 들렀다 오고는 했다. 집에 여우 같은 애인이 있다고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오늘도 그런 참이었다.

 

 

"반려식물이면, 형이 키우는 저런 거?"

"저런 거라니...! 이름이 다 있어, 쟤 이름은 차니야...!"

"이름이 왜 그 모양이야. 찬들이 때문에 그렇게 지었어요?"

"어, 비슷한데... 처음에 찬들이가 물을 한 번 잘못 줬다가 큰일날 뻔 해서, 가현이가 얘 죽으면 너도 죽는다고 그렇게 지어줬어."

"애들도 변한 게 없네..."

 

 

서한빛이 익숙하다는 눈으로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익숙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냥 새싹이처럼 같이 산다고 생각해. 새싹이 잘 크고 있다며? 어쩌면 너도 돌보는 거에 소질이 있을 수도 있잖아."

"소질이 있었으면 좋을 뻔 했죠. 자기 하나 돌보는 거 가르치는 것도 무진장 애먹었는데..."

"해보면 좋아, 마음도 편해지고, 애인이랑 같이 할 수도 있고... ... 한빛아."

"왜요."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랑 똑같은 거야."

"... ... 딱히 그렇지는 않던데."

"너는 일부러 안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고, 그러니까 더 해봐야 하는 거고... 너도 아직 많은 게 서투르잖아."

 

 

서한빛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누가 봐도 아닌데요, 하는 말을 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버릇이 있었다. 알았던 것을 모른다 고해하면 그는 곧 단죄로 이어졌다. 그가 무언가를 굳이 들여다보지 않는 것은 심연을 멀리하는 철학자와 닮아 있었다. 

 

곧 가벼운 웃음 소리가 이어졌다. 서한빛은 그 웃음 소리에 이미 익숙했다.

 

 

"잘 생각해봐. 집에 가는 길에 화분 하나 사가는 것도 좋겠네."

"얘기는 고마운데... 나는 나랑 내 애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서요. 아, 새싹이도."

"그러면서 생각해볼 거지? 새싹이라도 나오면 사진 찍어 보내줘, 햄스터 새싹이도 좋고..."

"형, 새싹이 보려고 나한테 연락하죠?"

"아... ... 혹시 나 들켰어?"

"... ... 생각 절대 안 해볼 거예요."

 

 

 

 

*

 

 

 

 

"... ... 라고 했는데."

 

 

서한빛은 손에 들린 화분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정말 나쁜 생각이기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 형이 얘기했으면 일단 반은 맞으니까 큰 손해도 아닐 거고... 그리고 꼬맹이가 신경 쓸 곳이 하나 더 생기면 그래도 뭐, 다른 곳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니까 좋은 거고... 서한빛은 자기 자신에게 구구절절 핑계를 대며 문을 열어젖혔다.

 

 

"나 왔어요."

"형 왔어요? 어라, 손에 그건 또 뭐예요?"

"화분이죠, 보면 알잖아요."

"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묻겠어요?"

 

 

앞치마를 둘러메고 총총 나온 하나님이 무어라 하든지 말든지, 서한빛은 아랑곳않고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야 베란다 문을 다른 손으로 열어젖힌 그는 조심스레 화분을 내려놓았다. 문 틈으로 고개를 빠끔 내민 하나님이 별 일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형, 식물 키울 거예요?"

"... ... 아뇨."

"그럼 무슨 인테리어 소품이에요? 소품을 왜 베란다에 놔둬요?"

"아니, 그것도 아닌데... ... 말하자면 길어요."

"무슨 영화 도입부예요, 집에 사연 긴 화분을 들고 오는 사람이 있게?"

"내가 너 영화 너무 많이 본다고 했죠."

 

 

콩트 연습을 하는 것 같은 대화가 한 차례 지나갔다. 그들에게는 일상과 다를 바 없던 일인지라 웃는 사람은 그닥 없었다. 서한빛이 심란한 표정으로 화분에 한 번 시선을 주었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바스락거리는 흙만이 묻어나는 화분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온 신경이 다 저쪽에 쏠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래서 그닥 끌리지 않았던 건데. 그렇지만 사온 이상 정말 인테리어로 놔두기만 할 수는 없었다. 서한빛은 적어도 자신의 일에 책임은 질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 예전을 제외하면... ... 그가 도로 시선을 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다시 화분에 대해 입을 연 것은 저녁 테이블 위에서였다.

 

 

"그래서, 사촌 형 얘기를 듣고 저걸 키우려고 사온 거라고요?"

"내가 무슨 다단계 넘어간 것처럼 말하는데, 이거 그렇게 심각한 일 아니거든요."

"생명 하나 책임지는 건 심각한 일이거든요? 우리 새싹이를 보라고요."

"뭐, 네가 새싹이가 낮에 너무 오래 자는 것 같지 않냐고 나한테 물었던 그런 거 얘기하는 거예요?"

"그 얘기는 대체 언제쯤 안 꺼낼 거예요? 삭혀 먹으려고요?"

 

 

서한빛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웃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며 하나님이 종알거렸으나, 그런 말은 식탁 말고 침대에서 하는 거라는 서한빛에게 막혀 곧 조용해졌다.

 

잠시간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가 이어졌다. 생각에 잠긴 듯 혹은 기억을 더듬는 듯, 허공에 시선을 주던 서한빛은 곧 하나님에게 다시 눈길을 돌렸다. 결국 자신의 신만이 알고 있는 답이 있기 마련이다.

 

 

"형이 그러는데,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자기를 들여다보는 거래요."

"사촌 형이? 뭐, 좋은 얘기네요."

"그런데 나는 너를 돌보면서 그런 느낌 없었거든요. 너는 새싹이 보면서 그런 느낌이 들어요?"

"나를 언제 돌봤다고 그래요? 내가 알아서 잘 큰 거지, 매번 집에 돌아오면 과제만 엄청 해대다가 내가 살살 꼬셔야,"

"밥 먹던 거 한 번 싹 치워보고 싶어요?"

"잘 먹는 걸 왜 치워요?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서한빛이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깔깔대고 웃던 하나님이 식탁에 팔을 얹어 턱을 괴며 그를 마주했다.

 

 

"뭐, 그게 그렇게 거창한 일이기는 하더라고요."

"거창한 일까지나 돼요?"

"음, 가끔 그럴 때가 있었거든요. 형이 나가고 나면 집에서 혼자 가만히 창문 밖만 보는 날이... 있었는데. 그렇게 한참 있다가, 갑자기 새싹이 밥을 안 준 게 생각이 나는 거야. 그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어요."

"... ..."

"가끔은 아무것도 모르겠고 다 귀찮아서 그냥 누워만 있을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형이 올 때 쯤이 되면... ... 그래도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어나서 새싹이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에는 그냥, 뭐. 단순한 책임감이었죠."

"알아요, 그것도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그럴 거 같더라. 알고 있어요, 형이 가끔 새싹이 나 대신 돌봐준 거."

 

 

서한빛은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앞에서 가벼운 웃음 소리가 들렸다. 아주 익숙한.

 

 

"그래서 나는 그 사촌 형 말도 아주 틀린 것 같지는 않아요. 한 번 속는 셈 치고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정도?"

"나는 너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데, 정말 그게 될 것 같아요?"

"혹시 알아요? 형도 없던 책임감이라는 게 생길지?"

"뭐 하나 한다고 생길 거면 예전에 생겼겠죠, 날 아직 몰라요?"

"아, 그건 그렇다. 내가 형을 너무 과대평가했네."

 

 

서한빛이 심란한 표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도움 안 되는 꼬맹이라느니, 이러다 내가 제명에 못 죽는다느니 하는 푸념을 잠깐 늘어놓던 그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장난기 같은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뭐, 나도 생각나면 도와줄게요."

"고마워 죽겠네요, 아주."

"어허, 예쁜 애인을 두고 죽으면 안 되죠."

"정말 말이나 못 하면."

 

 

 

 

*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서한빛은 스프레이를 들고 화분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흙이 패이지 않도록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라니, 대체 어느 나절에 물을 주고 있는단 말인가. 게다가 흠뻑 젖을 정도면 대체 어느 정도냐고. 물이 넘치면 흠뻑 젖은 건가? 아니면 화분에서 물이 떨어지면 그만하라든지, 명확한 얘기가 있어야지. 레지 시절에 대충 이렇게만 하면 된다며 주사기를 들고 오던 조교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갑자기 속이 안 좋아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예전에 본 것처럼 물을 대충 뿌리면서 그닥 유쾌하지는 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참이었다.

 

 

"형, 뭐 해요? 지금 물 주는 거예요?"

 

 

들려온 목소리에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돌려버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나마 유쾌의 유 자 정도는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변명을 하자면, 늘 반응하던 목소리를 인지해 벌어진 반사적인 반응이었고, 다르게 말하자면,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후자는 늘 그랬던 일이었지만.

 

 

치익. 제 애인의 얼굴에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서야 도로 정신이 들었다. 눈앞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인상을 쓰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이 있었다.

 

 

"아, 지금 뭐 하는 거예요!"

"... ..."

 

 

생각이 없기는 없다 싶었다. 서한빛은 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그동안 가만히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하나님은 불평을 한참 늘어놓았고, 서한빛은 당연하게 자신의 업보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물기를 다 닦아주고 나자, 서한빛은 뻔뻔하게 그를 바라보며 손수건을 집어넣었다.

 

 

"꽃에 물 준 거예요."

"아니, 물 준 걸 왜 닦아요?"

"생각해보니 너무 많이 준 거 같아서요."

"형, 미쳤어요?"

"너한테 미치기는 했죠."

"아, 그런 거 대체 어디서 배워와요, 좀!"

 

 

질색하는 하나님을 보다 서한빛이 웃음을 흘리며 그를 안아들었다. 여전히 삐진 것 같은 애인을 달래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서한빛에게는 그만한 시간이 있었으며 그를 기꺼이 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물론 화해는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애인이 지쳐 반쯤 늘어지고 나서야 겨우 이루어질 수 있었다.

 

 

 

 

*

 

 

 

 

서한빛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었다. 보통 이 정도라면 새싹이 튼다고 했는데. 벌써 시간이 제법 지났다. 지금쯤 싹이 났어도 벌써 났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으로 사왔던 화분을, 그동안 제법 자주 들여다보았다. 이제 화분에 어떤 흠집이 어느 위치에 나 있는지까지 외울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화분에서는 새싹은 커녕, 초록빛의 초 자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해보기로 했다. 서한빛은 어릴 적부터 머리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습관이 있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우선 살펴보고 배운다. 그것만은 사이가 좋지 않은 제 동생과 닮은 곳이었다. 물론 그 때문에 성인도 채 되기 전에 대학에 들어가기도 했고.

 

그는 활자에 익숙했다. 이론으로 돌아가는 시공간과,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상을 읽는 데에 익숙했다. 그렇다보니 그는 자주 책으로 도피하고는 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손 끝에서 책이 하나 더 펼쳐졌다.

 

그는 읽었다.

 

 

"식물을 키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돌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서한빛은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식물을 키우는 데에 전혀 소질이 없었다.

도로 책을 덮었다.

 

 

 

 

*

 

 

 

 

일요일 오후의 햇살이 비치는 날이었다. 간만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재미있어 보이는 영화를 방영하고 있었다. 주인공 둘이서 사랑을 확인하고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지나갔다. 하나님이 저런, 하고 혀를 차며 옆에 있던 팝콘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서한빛은 왜 저기서 우는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저 지나치는 혜성을 보며 아름다움이 존재함을 깨닫듯이, 스쳐가는 바람에 봄이 왔음을 깨닫듯이, 속절없이 깨달았다.

내가, 사랑을 하고 있구나. 나도 사랑 같은 걸 할 수 있는 인간이었구나. 세상 모든 감정 표현이 아무렇지 않게 나를 스쳐지나가는데, 너만은 스쳐지나가는 감정이 아니었다고.

 

 

정말 아무렇지 않게, 서한빛이 문득 입을 열었다.

 

 

"우리, 새삼스럽게 되게 오래 붙들고 있네요."

"무슨 소리예요?"

"벌써 몇 년 됐잖아요. 5년은 넘었고, 햇수로 따지자면 훨씬 더 넘을 거고."

"왜요, 이제 슬슬 질려서?"

"그럴 리가요."

 

 

서한빛이 어두운 텔레비전 화면에 실루엣으로만 어렴풋하게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품에는 안겨서 다리를 동당거리고 있는, 새싹 같은 애인이 있었다. 유일하게 자신이 스쳐지나가지 못한, 사람. 그러고 싶지 않았던 사람.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려 애쓸 동안, 너는 그 비어있던 눈빛 하나만으로 속절없이 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고. 아무렇지 않게, 네가 깨닫지조차 못 할 새에.

 

 

"그냥, 내가 널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서."

 

 

서한빛은 인정해야만 했다. 서한빛은 하나님을 많이 바꾸어 놓았으나, 하나님 역시 서한빛을 바꾸어 놓았음을. 그러니 계속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정말 마주해야만 할 때가 되었음을. 더 이상 도망가기만 할 수는 없음을.

 

그래서 서한빛은 하나님이 마주볼 수 있도록 해준 것들을 마주보기로 했다.

 

 

 

 

*

 

 

 

 

오래도록 시선을 받지 못 했던 것에서는 썩은내가 난다. 이미 외면받아온 것은 오래도록 사람들을 외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간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심연 역시 다르지 않다. 고인 물은 언젠가는 썩기 마련이다. 그러니 오래도록 마주하지 않은 자신 안의 샘을 들여다보려면, 당연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 썩은내가 나도록 고여버린 심연을 들여다볼 용기가.

 

서한빛은 제 품에서 잠에 든 하나님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에게 용기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낮게, 그러나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심장 소리와 작은 온기, 그리고 숨 소리. 그것이 전부였다.

 

 

이윽고 그가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한 손만으로 비밀번호조차 걸리지 않은 화면을 켜고, 한 곳으로 느리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에는 겨우 잠든 애인이 잠에서 깰까봐 소리조차 내지 않고 다니는 이였으나 지금은 달랐다. 그를 안은 채가 아니고서는, 평생 이런 말을 할 용기 따위는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는, 이런 면에 있어서만은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뚝. 한동안 이어지던 연결음이 멈추었다.

 

 

'한빛아? 무슨 일이야?'

"형, ... ..."

'어, 왜?'

 

 

한동안 말없이 자신의 종교의 얼굴을 바라보던 서한빛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 동생 번호 좀 줘요."

 

 

 

 

*

 

 

 

 

무거운 교재를 책상 한구석에 내려놓은 서한빛이 주먹으로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쌓아뒀던 전공 서적들을 창고로 옮기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이런 걸 대학 때 어떻게 매번 들고 다닌 거지. 놔뒀다가 예쁜이 운동할 때 쓰라고 해도 되겠다.

 

 

"형, 저거 어디에 둘 거예요? 말해두는데, 저거 무거워서 나 못 들어요."

"시키지도 않을 거니까 가만히나 있어요, 먼지 난다."

"그러게 저런 건 불쏘시개로나 쓰라고 했잖아요, 갑자기 웬 안 하던 대청소예요?"

"안 하던 거니까 이제 하려고요."

 

 

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익숙하게 대답을 해준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먼지 때문에 손부채질을 연신 해대던 그가 베란다 쪽으로 다가가 문을 끝까지 열었다.

 

 

"아, 먼지... ..."

 

 

문득 내려간 그의 시선 끝에 자그마한 녹색이 하나 걸렸다.

 

새싹이었다.

 

 

"... ..."

 

 

서한빛은 그 모든 것에 덤덤했다. 자신이 관심조차 표하지 않던 사람들의 진심, 자신에게 등을 돌리던 동생, 자신이 끝내 일으켜 낸 아이의 온기, 속절없이 사랑 앞에 무너지는 자기 자신, 심연에서 썩은내를 내고 있던 과거. 그 모든 것에.

 

그러니 이런 시작 역시, 아무렇지 않았다. 덤덤하게 사랑을 깨달았듯이, 덤덤하게, 터져 나오기 시작한 심연을,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자기 자신의 세상을, 그리고 그 틈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는 햇빛과 새싹을 받아들였다.

 

 

"형, 뭐 해요? 안 와요? 이 연약한 애인을 이 무거운 짐덩이들 사이에 홀로 놔두고?"

 

 

서한빛이 등을 돌렸다. 새싹은 금방 자라지 않는다. 세상 역시 한 번에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이어지게 될 것이다.

 

 

"잠깐도 혼자 못 있는 애인인 줄은 몰랐네요, 밖에는 어떻게 나가요?"

"그거야 형도 나가니까 나도 나가는 거죠. 먼지나 좀 어떻게 해봐요."

"갑니다, 가요. 그거 안 밟게 조심해요, 목욕으로 안 끝난다."

 

 

어디선가 봄바람 같은 것이 불었다. 새싹이 작게 흔들렸다.

 

불행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21년도 4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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