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 챌린지 50 :: No 16. 가장 무서운 것
- 썰 기반, 선우제휘 관계 로그(+환멸즈).
- 13000자 정도.
소년의 다정을 겪은 이들은 흔히, 소년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는 했다. 소년은 언제나 조용했다. 그는 자신의 세상을 내보이기 싫다는 의사표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년은 다정했다. 다정은 착각이라는 병과도 비슷했다. 그 때문에 소년은, 자신을 허물없이 대하는 이를 보통 불편해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벽을 뚫고 나면 소년의 세상 안에서 안식할 수 있음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그래서, 맨 처음 만났을 때 소년은 그를 제법 불편해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지 못 했다.
"그래서 이 부대의 이름은... ... 뭘로 하냐."
"전처럼 또 메뚜기 이런 거 하려고요? 내가 당신 이름 짓고 다니지 말랬죠."
"메뚜기가 뭐 어때서?"
"그러게, 뭐 어때서? 여치로 해, 그럼."
소년이 이마를 짚었다. 제 앞의 남자 둘은 역시 이름을 잘 지었다며 낄낄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먼저 움직일 전초 부대니까 잘 좀 지어봐요, 자주 불러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치면 메뚜기보다는 여치가 낫지 않냐?"
"제휘, 당신은 그 여치에서 좀 벗어날 수 없어요?"
"여치가 뭐 어때서?"
"하, 대장이 메뚜기 부대 만들 때 말렸어야 했는데......"
머리를 싸쥐던 소년이 한숨을 쉬며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소년은 밤하늘을 사랑하는 버릇이 있었다. 밤하늘에는 소년이 밤을 새어 세어도 전부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밝은 별들이 담겨 있었다. 소년은 그를 사랑하는 버릇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그를 헤아리던 소년의 시선 끝에, 문득 밝은 별 하나가 걸렸다. 잠시 별과 시선을 맞추며 고민을 되삼키던 소년이 도로 고개를 내렸다.
"예전에 나왔던 북극성으로 하죠. 폴라리스(Polaris)."
"좀 길지 않냐?"
"그럼 빨리 말해요. 내가 부대 하나 살려준 거예요, 여치보다 낫다."
"야, 여치가 뭐가 어떤데! 메뚜기들 들으면 섭섭해한다?"
"그렇게 지어준 대장한테 더 섭섭해하겠죠, 이 양반아."
소년이 옆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을 무시한 채 서류에 이름을 휘갈겨 적었다. 신설 부대, Polaris. 부대장, 선우 제휘. 옆에서 짓궂은 목소리들이 계속 들려왔고 소년은 결국 손을 들어 그들의 등짝을 한 대씩 때렸다.
소년은 그를 편하게 대했으나 그는 단순히 그가 소년을 편하게 대하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벽을 쌓아두는 버릇이 있었으나, 그는 매번 그의 주먹질 한 번에 가볍게 무너지고는 했다. 소년은 늘 그 벽의 잔해를 손에 쥐고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그러나 소년은 그를 믿었다. 정확히는 그의 능력을 믿었다.
매번 선두에 서서 전장을 헤집어놓는, 무엇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강인함을 믿었다.
그래서 자신의 황제가 그를 믿듯이, 소년 역시 그를 믿기로 했다.
소년이 기억하는 그의 처음은 그러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은 그를 대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정확히는, 그가 어떤 부류인지를 알아챘다.
그는 사람을 귀찮아 했다. 누군가와 필요 이상으로 친해지지 않았고, 모두를 편하게 대했으나 동시에 모두를 불편해했다. 그에게 실수로라도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은 얼마 전에 구했던 작은 아이와 대장을 제외하고는 잘 없었다. 아이는 유독 대장과 소년과 그의 손만을 탔다. 소년은 야생 장미와도 같은 그 아이를 돌보며 여느 아이들처럼 다정을 가르쳤다. 그 역시 아이를 보호하는 이 중 하나였다.
어느 날, 모닥불 위로 비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소년은 깨달았다. 어딘지, 그는 온기를 두려워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범이 병아리를 다치게 할까 두려워하는 것만 같은, 그런 부류의 두려움이었다.
소년은 그 두려움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년은 그와 밤을 지샐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이 푹신한 털 위로 가볍게 몸을 던졌다. 정말 담요 같다, 그렇게 중얼거린 소년이 그 위에서 도르르, 한 바퀴를 구르다 땅으로 폭 엎어졌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그가 귀찮다는 듯이 꼬리로 땅을 탁탁 치는 것이 느껴졌다. 소년이 짧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로 그에게 등을 기댔다. 소년의 등 뒤에 누운 것은, 소년의 두 배는 되고도 남을 듯한 거대한 백호였다.
"얼굴에 다 써 있어요. 왜 안 자고 나왔냐고 묻고 싶은 거죠?"
"... ..."
낮은 그르릉 소리가 들렸다. 꼭, 그래, 꼬맹아,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소년이 가볍게 웃었다.
"그냥, 당신 혼자 불침번 서니까."
"... ..."
"심심하잖아요, 부대 사람들 다 저 안에 있는데."
"... ..."
"있죠, 당신 그거 알아요? 호랑이는 외로우면, 아야."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꼬리가 소년의 팔을 툭 치고 지나갔다. 이거 나연이가 가르쳐 준 건데, 소년이 부러 엄살을 부리며 그에게 등을 기대고 반쯤 누웠다.
"나 망 잘 봐요. 불침번도 잘 서고. 사흘 내내 한숨도 안 자고 망 본 적도 있어요."
"... ..."
"못미더운 눈 하지 말아요, 내가 버티는 거 하나는 얼마나 잘하는데."
"... ..."
"그럴 일 없을 거 같지만, 당신이 이렇게 혼자 있다가 만에 하나라도 잠들어 버리면 어떻게 해요."
"... ..."
"... ...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듣는 척이라도 할 수 없어요? 나도 당장 당신 코골고 자게 만들 수 있다? 진짜로?"
소년의 말에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백호가 금빛 눈을 돌렸다. 소년이 부러 입을 비죽이며 그에게 마저 등을 기댔다. 맞닿은 온기는 인간 치고는 퍽 따뜻해서, 서늘한 바람에도 딱히 이불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냥... ... 혼자 있지 말라고요."
"... ..."
"혼자 있지 말아요.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그 어느 것도, 그냥... ..."
"... ..."
"... ... 알아요, 그런 적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
"... ..."
"어쩌면 웃기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지가 뭔데 저런 말을 하냐, 그렇게."
"... ..."
소년은 느리게 눈길을 위로 돌렸다. 퍽 밝은 별이 뜬 밤이었다. 그 덕에 흐린 별까지도 아름답게 보이는 날. 소년은 밝은 밤하늘을 사랑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소년은 익숙하게 밝은 별과 눈을 맞추었다. 꼭 별을, 그 긴 생 하나를 통째로 들여다보듯이.
"혼자 있으면 뭐든지 해결될 것만 같던 때가 있었어요. 모든 문제는 나 때문에 생겼다는 걸 알았던 때가."
"... ..."
"그런데, ... ... 참 이상하더라고요. 아무것도 해결되지가 않더라. 그냥 흘러만 가더라고요. 내가 잡을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그랬는데... ... 이렇게 같이 있어줄 사람이 생기고 나서야 알겠더라고요."
"... ..."
"그때 내가 외로웠을 뿐이었다는 걸."
소년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소년의 표정에는 드물게 그리움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그에게서 한 번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소년은 그가 그것으로 답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니, 사실 그런 대답을 듣기 위해, 소년은 그에게 자신의 밤을 지불했다.
"그러니까 혼자 있지 말라고요."
"... ..."
"같이 있어보라고. 외로움이 정말 어떤 건지, 당신이 얼마나 아무것도 못 하는 존재인지, 다 배우라고."
"... ..."
"나연이한테도 잘해주고요. 부대 사람들한테도."
"... ..."
밤이 깊었다. 저 멀리서 북극성이 환하게 빛났다. 소년은 그 옆의 흐린 별을 바라보았다. 육등성이다. 밤하늘과도 같은, 빛이 아니라 어두움을 가진 별이다.
"있죠, 북극성은 길잡이 별이래요."
"... ..."
"혜성은 먼 여정을 떠나는 별이고요."
"... ..."
"그럼 나는... ... 어떤 별이 될까요."
"... ..."
"당신 방금, 내가 어떻게 아냐, 그런 생각했죠?"
그의 등 뒤에서 작게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라는 건가... 소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세를 한 번 고쳤다. 낮은 온도의 밤바람이 소년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년이 자장, 자장, 하고 중얼거리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결국 그의 꼬리에 소년의 손이 묶였다. 소년이 잠시간 발버둥을 치자 다시 풀렸다. 소년이 흥, 하는 소리를 부러 흘리며 그에게 도로 기대어 누웠다.
어쩌면 소년은, 그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영영 별 따위는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소년은 등에 닿은 온기 하나에 웃었다.
그리고 제 손으로 제 벽을 산산조각 냈다.
*
소년은 그에게 의지할 때가 퍽 많았다. 그저 그가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하얀 별을 여행하는 기차 안에서, 별의 주인의 품에 안겨 그 세상을 구경하는 기분은 특별하지 않은가. 소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서 다정을 배울 때가 있었다. 자신의 아이의 일에서도, 혁명군의 일에서도, 전투에서도.
이따금 소년은 그가 버거울 때가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다정이라는 무기를 벼리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무기를 드는 일은 없었다. 소년은 자신의 일에서는 유독 자주 도망쳤다. 그러니까, 아직 그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있죠."
소년의 세상에는 법률이 존재했다. 소년의 벽 너머에는 혼돈만이 기어다니고 있었고, 소년은 자신의 아이들만을 사랑할 줄 알았다. 소년의 세상은 그 간단한 글자가 생명을 얻는 곳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가끔 그에게서 배운 선과 다정으로 세상을 조율하고는 했다. 덕분에 소년의 세상에는 곡선이 참으로 많았고, 소년은 그 선을 넘지 않아야 했다. 그라고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
소년은 평소처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 꺼져가는 모닥불만이 소년의 얼굴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유독 긴 밤이 이어지는 날이었다. 그들에게는 해가 지지 않는 밤과 마지막 생을 위한 까닭만이 길게 이어졌으나, 언제나 별만이 빛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나 밤하늘의 공백과도 같은 시간을 건너는 소년에게는.
소년은 별을 사랑하는 일이 잦았다. 자신의 장미를 두고 여행을 떠나거나 별을 매일 새로이 세는 일은 없었으나, 밤하늘과 함께 여정을 떠나는 일만은 유독 잦았다.
그래서였을까. 그와 있을 때 역시, 태양보다는 별이 떠있을 때가 많았다.
"그냥, 당신은 대장이 데려온 사람이었으니까.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요. 대장을 도와줄, 대장의 세계 안에 들어 있는 사람. 우리를 도와줄, 적이 아닌 사람. 같은 동료."
"그러다 등짝 때릴 사람이 된 거냐?"
"장난 치려는 거 아니에요, 나."
그는 곧잘, 이런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양 굴었다. 소년은 그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를 관찰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 소년은 언제나 누군가를 쉬이 믿는 사람이 되질 못 했다. 그러니 그 역시, 아직 자신의 세상 안으로 들일 준비를 마치지 못 했다. 확신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가 그곳에 있었다. 소년이 스스로 부수어버린 벽의 잔해를 밟고, 소년의 세상 안에. 그 언젠가부터.
소년은, 다정한 소년은, 자신을 위해 칼을 들지 못 하는 소년은.
덜컥 겁이 났다.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그러니 이것은 충동이다.
"그런데, 왜... ... 왜 나한테 잘해줘요? 왜 나랑 같이 있어주는 거예요, 내가 좋아요?"
"뭐?"
"진짜, 나는... ... 나는 당신이 왜 날 받아들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해가 안 간다고요. 그냥 괜찮은 의료부라서 그래요? 아니면 대장이랑 오래 있었어서? 부대장이라서? 나연이랑 잘 지내서?"
다정은 병과 비슷하다. 앓다보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전부 잊게 된다. 그래서 소년은 자신의 아이만을 사랑하는 법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이상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금빛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길을 잃고 나면 어디선가 북극성이 빛나고 있었다.
소년은 이미, 그를 제 세상 안으로 들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먼저 허물어진 벽 안으로 스스럼없이 걸어들어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소년은 고민했다. 지금 도망갈까. 너무 충동적인가. 아니야, 혹시 모르잖아.
그렇지만, 정작 그는 큰 망설임이 없었다. 다 꺼져가는 모닥불에 장작을 더 넣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듯, 손에 든 나뭇가지로 불씨를 쿡쿡 찌르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무슨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뭘 그런 걸 묻냐, 낯간지럽게. 뭐, ... ... 그냥. 네가 다정하지만은 않아서."
"... ... 네?"
"네가 안전해서. 너를 악의로 대하지 않는 이상은, 누군가를 해할 놈은 아닌 것 같았거든.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내 이기심일지도 모르고."
소년은 우산을 쓰고 황금빛 비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스콜이리라 생각했다, 혹은 곧 지나갈 소나기. 그러나 그치지 않았다. 소년은 다시 비를 맞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그저, 기다렸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야, 소년은 간신히 우산 밖으로 손을 뻗을 수 있었다. 소년의 핏빛 손가락을 스치고, 금빛 물줄기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따뜻한, 비였다.
"... ... 다."
"어, 뭐라고?"
"... ... 아니에요, 아무것도."
싱겁기는, 그가 소년의 팔을 툭 치고는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구석으로 던졌다. 불 그냥 그렇게 꺼놔라, 오늘은 꺼도 되겠다. 그렇게 말한 그는 먼저 천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삼켜져도, 별처럼 잘 보이는 것만 같은 그의 뒷모습을, 완전히 사라져 버릴 때까지.
"... ... 길겠다고. 우리가 견뎌야 할 시간이."
처음으로, 맞아도 괜찮은 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도박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러니 한 번 우산을 내던지면 다시 쓸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인지 아주 오랜 밤을 건너, 그 오랜 시간을 사랑하며 그 비를 한 번 맞아봐도, 될 것만 같았다. 그 긴 시간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견뎌도 될 것만 같았다. 그걸 다 감당하고, 받아들여도 될 것만 같았다. 그저 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소년은 제 안으로 걸음하는 그를 구태여 막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를 이해했다.
소년은, 처음으로 누군가 남길 시간을 사랑해보기로 했다.
*
불안함이 계속 살아남아서 치명적인 형체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소년은 막사의 천에 비치는 거대한 팔을 보며 그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그의 세계에 있어 치명적일 뿐이다. 그는 소년을 죽이지 못 한다. 소년은 어느 새 그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치명적인 불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 한다면, 그것은 소년에게 두려운 일이 될 것이었다.
들어간다는 말도 건네지 않은 채, 소년이 천막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눈앞에 펼쳐진, 퍽 치명적인 형체에는 잠시 덤덤한 시선만 한 번 주었다. 반은 짐승이고, 반은 인간인 모양새. 그러나 소년은 얼마 전까지 저 위에 드러누워 장난을 쳤다. 두려울 리가 없었다.
그가 몸을 웅크리는 것과 동시에 소년의 눈이 푸른 빛을 흘렸다.
천천히, 그가 흥분하지 않도록. 소년은 언제 어디에서나 의료부의 소양을 다 할 줄 알았다.
"나가."
그가 으르렁거리며 내뱉었다. 거의 짐승의 소리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소년은 알아들었다. 소년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알았다. 분명, 하필 전투력도 없는 놈이 들어왔다고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소년은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소년이 약하기만 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당신은 매번 알아듣지를 못 하더라. 나도 당신을 죽일 수 있다는데."
"... ..."
"알아요, 안 믿을 거라는 거. ... ... 아, 안 들리나?"
소년이 능력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조금 더 집중해서, 그의 혈액 속을 타고 흐를 그 모든 것을 조절한다. 한 번 더, 그가 자신을 알아보도록. 안심할 수 있도록. 소년이 다시 갈빛 눈으로 돌아올 때 즈음, 그 역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지금 그의 것 같은 눈을 잘 알고 있었다. 날을 세운, 그리고 두려워 하고 있는 눈이다.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 ..."
"당신은 강하니까."
진해진 호박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소년은 그가 무엇 때문에 떨고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소년 역시 기나긴 밤을, 자신의 온기 때문에 떨며 지샜다. 소년은 매번 누군가를 죽이는 이였다. 누군가를 살리는 것은 소년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 소년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밤을 건너왔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 있어요, 당신이 폭주해도 죽지 않을 자신."
소년은 자가 치유가 가능했다. 숱한 노력의 결과였다. 정신만 잘 붙잡고 있는다면 즉사가 아니고서야 죽을 일은 딱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소년은 그의 손에 역시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아이를 제 세계 안으로 들일 때마다 반드시 약속 하나를 쥐여주었다. 나는 당신을 살릴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 약속이었다.
그가 사납게 포효하듯 짧게 짖었다. 무슨 뜻일까. 소년은 두려움 하나 머금지 않는 눈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부족하다는 뜻일까. 죽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한가. 그렇다면 무엇을 쥐여주어야, 그가 편안한 밤을 지샐 수 있을까. 내가 그 밤을 지새면서 바랐던 것은, 아. 아아.
"... ... 알아요, 당신이 정부군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 ..."
"그래서 이성을 잃는 순간, 그때 나올 본성이 한없이 공격적이라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명하리만치 치부를 들추는 일이다. 그가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년이 쓰게 웃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의 아픔을 공유하는 인간이었다. 소년은 동족을 잘 알아보는 편이었다. 나 역시 정부군의 손에 끌려가 얻은 능력으로, 지금 당신을 살리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러나, 그렇기에,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소년이 자신을 후벼파듯 입을 열었다.
"내가 어디가 그렇게 못미더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알지만... ... 괜찮아요, 내가 못 한다면 대장이 당신을 제압할 수 있으니까. 당신이 누군가를 상처 입히기 전에."
소년은 자신의 상처를 가정하지 않았다. 금방 낫는 일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소년은 금세 지나가는 일에는 언제나 무감각했다... ... 소년은 그의 떨림이 멈추었음을 깨달았다.
"... ... 이걸 원해요?"
그래, 그럴 것이다. 그 기나긴 밤, 소년이 원했던 것 역시 그것이었다.
제 세계를 제 손으로 부수기 전에, 자신을 죽여서라도 막아줄 누군가.
"그래요, 대장은 당신을 죽일 수 있어요. 그 선택지 밖에 없다면."
그래서 소년 역시 자기 자신을 죽일 힘을 키우지 않았던가.
소년의 눈가가 푸른 밤공기의 색으로 물들고, 그의 몸이 인간의 형상을 서서히 되찾기 시작했다. 커졌던 뼈가 부러지듯 몸 안으로 숨고, 인간의 것이 아닌 털이 사라졌다. 짐승의 이빨이 인간의 뭉툭한 것으로 변했다. 그가 힘이 다 빠진 듯 반토막난 침대에 쓰러지듯 눕는 것을 보고서야 소년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소년은 땀에 흠뻑 젖은 그의 머리에 조심스레 손을 대고는 눈을 감고 그의 몸 상태를 파악했다. 당신을 살릴 사람임을 전하는 것 마냥, 다정하게 그의 육신에게 말을 걸었다. 부드럽고 잔잔한 시를 자장가로 삼은 이처럼, 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것 같았다.
그러자 소년이 눈을 떠 그의 몸을 한 번 더 살폈다.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뼈도, 근육도 그렇고. 원체 대단한 회복력을 자랑하는 치이니, 한숨 자고 나면 금방 괜찮아질 것이다.
자신의 일을 끝낸 소년의 눈가에서 밤공기가 사라졌다. 그를 살려냈으니 이제 자신의 볼일은 끝났다. 힘도 빠졌으니 그 역시 오늘 단잠을 자게 될 것이다. ... ... 다행이다, 당신이 다치지 않아서. 당신이 다치게 하지 않아서 다행인 게 아니라, 그저 당신이 다치지 않아서.
소년은 조심히 손을 떼어내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턱, 소년의 손목이 잡혔다. 소년이 차분하게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사냥당하지 않으려는 본능은 아니었다. 그저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 소년은 그의 탁한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에 깃든 흐린 별빛을 보았다.
"... ... 왜요."
"미안한데, 계속 좀 말해줘."
"... ..."
"대장이 날 죽일 수 있다고."
가끔 세상은, 소년에게 퍽 잔인한 일을 종용했다. 소년은 그를 살리고 싶었다. 그가 가장 밝게 타오르는 별이라면, 자신은 그 빛을 세상에 흐트러짐 없이 전해줄 수 있는 어둠이기를 바랐다. 그가 세상에 의해 숨이 막혀 도망치는 날에는 차분한 밤공기가 되어 그의 곁에 머무르기를 바랐고, 빛을 잃은 밤에는 그를 대신해 하늘을 밝힐 흐린 육등성이기를 바랐다. 그랬다. 소년은 그가, 살아가기를 바랐다. 살아가기를.
"제휘, 당신,"
"넌 대장을 잘 알잖아."
"... ..."
"네가 말하면 믿을 수 있으니까."
그는 이따금 죽기를 바라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 하는 나날에 휩쓸려, 그대로 형체도 없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언제나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에게 기억되고 싶지도,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자신이 없으면 그가 아무것도 못 하게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스스로를 용서하고 사람의 온기를 믿을 수 있게 되기를, 자신보다 더 길게 헤매지는 않기를, 그렇게 편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뿐이었는데.
"... ... 네."
소년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희미하게 떨리는 손을 쥐고,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를 피하지 않고, 나직하게 기도하듯 읊조렸다. 대장은 당신을, 죽일 수 있어요. 그렇게, 오래도록, 꼭 그가 죽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결국 잠에 빠졌다. 긴장의 끈을 놓은 것 마냥, 어딘지 편안해진 얼굴로.
이미 깊은 새벽 어스름이 깔린 천막 안, 빛이라고는 하나 없는 그곳에서. 소년은 그가 그렇게 잠에 들고나서야 그의 손을 쥐고 기도할 수 있었다. 그가 깨어나지 않도록 드문드문 떨어지는 눈물에는 소리조차 없었다. 기도는 흐느낌을 참아낸 숨 때문에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래도 당신이 죽지 않기를 기도하기 위해,
이곳에 있기 때문에.
*
아, 제휘요? 뭐... 매번 저한테 쫑알댄다고 하면서도 제일 시끄러운 사람이죠. 전에도 한참 다쳐와 놓고서는, 내가 몸 사리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 또 이 모양이냐고 하니까, 거참 쫑알거리네, 그러면서 날 번쩍 들쳐업고 가는 거 있죠? 나한테 쫑알쫑알댄다고 하지만, 보면 사실 자기가 더 시끄럽거든요.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래도 내가, 어? 그나마 몇 안 되는 의료부니까 참고 살아주는 거지, 나 없었으면 또 어디서 긁혀와서 그냥 자면 낫는다는 이상한 소리나 해대고 있었을 거 아냐. 진짜 애 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 대장, 그거 거기 놔둬요. 아니, 거기에 서류로 탑 쌓지 말라니까요, 무너지면 당신이 정리할 거예요? 안 할 거면 얌전히 놔둬요, 아니면 나 그거 검토 하나도 안 하고 고대로 넘겨버린다, 진짜. 아, 이거, 별 건 아니고... 어,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 아, 미안해요, 대장이 워낙 시도때도 없이 서류를 떠넘기고 가서, 아, 네, 들어가요, 대장, 후방 부대 결재 서류 내일까지 처리하는 거 잊지 말고요! ... ... 아, 미안해요, 무슨 얘기 하고 있었죠. 아아, 맞다, 제휘. 미안해요, 요새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하여튼 그런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일을 못 하는 건 아니고요. 우리 전초 부대도 잘 돌아가고 있는 거 같고... 얼마 전에는 까불던 누구 하나한테 겁을 아주 제대로 줬다던데. 과하지는 않았나 모르겠어요, 그러고 앙심이라도 품으면 곤란하거든요. 깔끔하게 죽이는 게 제일 나은데 뭐라도 씌워볼까... 아,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줘요, 알죠? 덕분에 저도 큰 걱정은 없는 편이죠. 뭐, 여러 걱정이 있긴 한데... 아, 나연아, 어제 말했던 거 저기다가 뒀어요. 다치니까 다 내리지 말고요, 응. 아이구, 하지 말라니까, 진짜. 자, 잡아줄 테니까 잘 빼봐요. 찾던 거 그거 맞죠? 이거 내가 올려두면 되니까 가봐요, 응. 조심하고, 멀리 나가지 말고. 그거 생각보다 잘 들으니까 아무렇게나 휘두르지 말고요. 그래요, 저녁 시간 전에 돌아오고. ... ... 아, 진짜로... 미안해요. 애들이 워낙 자주 드나들어서... 응, 아니에요, 나야 늘 있는 일인 걸. 무슨 얘기 하고 있었죠? 아아, 맞다, 제휘. 뭐, 내 걱정을 덜어가는 대신 본인이 걱정이 되어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나연이도 이제 그렇게까지 걱정되지는 않고. 대장도 그렇고. 그냥, 이제 괜찮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거 있잖아요. 모닥불 멍하게 보고 있을 때나 별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드는 생각. ... ... 있죠, 사람들은 북극성을 보고 길을 찾잖아요. 그럼, 그 별이 보이면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거잖아요. 길을 잃은 사람은 그 별을 보고 안심하게 되고요. 그냥, 그런 기분이 드는 사람이에요. 물론 행동으로 믿음을 준다면 더 좋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알죠...
*
흐린 별이 뜬 밤이었다. 소년이 검푸른 숲 속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붉게 물이 든 눈가를 억지로 손등으로 부비며 더듬어 길을 찾다, 속에서 치솟는 것을 삼키지 못 하고 결국 토해냈다. 불그스름한 것이 흘러내려 푸르스름한 별빛에 젖어들었다. 거친 기침이 이어졌다. 하마터면 그대로 정신을 놓을 뻔 했다. 막혀오는 숨에 한참을 헐떡이던 소년은, 숨을 간신히 쉴 수 있게 되고서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억지로 눈을 뜬 소년이 저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에 든 듯 아무렇게나 바위에 기대어 있는 그가 보였다. 아, 좀 더 편하게 기대게 해줄 걸. 속이 타들어가는 고통에도 소년이 웃었다. 흐린 별이 곧 꺼질 것 같은 빛을 내며 소년의 길을 비추고 있었다.
소년은 그를 무엇이라 굳이 정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년은 그를 별이라 불렀다.
소년은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입가를 대충 훔쳤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소년의 발자국 위로 저녁 땅거미가 따라붙었다. 달도 뜨지 않은 밤, 소년의 앞길을 확인할 빛은 흐린 별빛 뿐이었다. 소년은 처음으로, 어두운 밤을 건너야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그만은, 이 어둠이 잘 숨겨내리라.
소년은 자신의 끝을 알고 있었다.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이제 당신에게 맡길 수 있겠다고.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년이 그에게 의지하던 이유 역시 이것이라.
소년의 발걸음은 그들 앞에 도달해서야 멎었다. 달빛조차 없이 어두운 밤, 사방에는 붉은 빛만이 넘쳐났다. 소년은 자신의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세상이 원하는 모습이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하나가 잡히면 끝나는 게임도 있는 법이다. 소년은 쥐고 있는 킹과 퀸을, 그리고 락을 굳이 얌전히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소년은 늘 비숍과 나이트를 희생하는 편이었다.
어쩌면 도망가는 것만 같겠다.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이 사라진 시간까지도, 나는 사랑하려 했는데.
결국에는 당신과의 이별까지는 사랑할 수 없어서.
"... ... 나도 할 수 있댔잖아요. 당신 금방이라도 자게 만들 수 있다고."
이제 당신은 해가 뜨지 않는 밤을 건너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당신이 감내해야할 시간이 훨씬 길지도 모르겠다고. 소년은 그 말을 굳이 건네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것만 같아서. 그렇지만 당신의 세상에는 흐린 별빛도, 어두운 밤하늘도 없이, 밝은 태양만이 떠 있을 테니까. 소년은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웃었다. 그는 분명 좋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내일도, 그 앞으로도.
안녕, 소리없는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리고는 미련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디선가 흐린 별이 떨어졌다.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21년도 5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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