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 챌린지 50 :: No 7. 심해
- 자캐즈 서태훈, 커뮤 '봄날' 엔딩 겸 페어 로그.
- Trigger Warning :: 전쟁, 약한 고어적 표현, 소중한 사람의 사망, 사망
- 3400자 정도.
소년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피와 흙이 튀어 엉망인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유독 죽어 있는 갈빛 눈이 심해의 색을 띤 하늘을 담는다.
소년은 사방에서 울리는 비명을 들었다. 소년에게는 더 이상 누군가를 지킬 힘이 없었다.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죽음의 소리.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럼에도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은, 주마등이 아닌, 어젯밤에 본 모닥불의 불빛이었다. 여기서 죽으면 그 불빛조차 다시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어 그리 큰일인가.
소년이 눈을 감았다. 소년이 주마등을 대신해 책장을 넘긴다. 소년은 비어 버린 어제의 기억을 다시 살려냈다. 책장이 넘어갔다.
어제 불침번이 누구였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제휘가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 맞아. 그가 모닥불에 손을 뻗었다. 그를 붙잡았다. 왜 그랬을까. 사람을 살릴 힘 같은 건 더 이상 제게 존재하지 않는데. 더 이상 나는 누군가를 살릴 수 없다. 그 전부터 제 힘은 죽었다. 왜 죽었더라. 아, 그래. 그가 죽었지. 제 세상의 가장 위에 앉은 이가. 죽었지, 참.
죽어? 누가 죽었다는 거지? 소년이 다시 기억을 살려낸다. 살아나지 않는다. 소년은 그제서야 다시금 깨닫는다. 제게 무언가를 살릴 힘 따위는 이제 없다. 제 힘은 어제부로 죽었다. 왜? 누가 죽었나? 아, 참. 죽었지. 그랬었다. 맞아, 그런데 누구였더라?
소년의 죽은 갈빛 눈이 어제의 자신을 향한다. 누군가 누워 있다. 그 옆에서 어제의 소년이 무릎을 꿇고 있다. 소년이 심해를 들여다본다. 어제의 소년이 고개를 든다. 깊은 바닷물이 가득 담긴 눈이 소년을 향한다. 심해가 소년을 들여다본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바닷물이 소년의 폐를 가득 채운다.
그래, 참. 그가 죽었구나. 제 세계 가장 위, 왕좌에 앉은 이가. 어제부로 죽었다. 제 눈 앞에서.
바닷물이 빠져나간다. 제 할일을 다 했다는 양. 소년이 숨을 들이쉬었다. 소년은 제가 했던 말들을 기억했다. 봄을 끌어당기겠다 말하고. 생명을 살리겠다 말하고.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말하고. 제 세상을 그의 발 아래에 바치겠다 말했고...... 소년이 이미 빛이 바랜 책장을 넘기듯 그를 떠올렸다. 소년의 손 끝이 한 페이지에서 멈춘다.
살자. 살아서 대장한테, ... 한테 콧대나 세우자.
소년이 눈을 뜬다. 심해가 아니다. 사방에서 터지는 화약의 파편. 매캐한 냄새. 살이 타는 소리. 비명. 죽어가는 소리. 죽은 소년의 눈이 심해의 빛을 담는다. 죽었다.
소년이 방금 읽은 장을 찢어 내버린다.
의미가, 없다. 살아 있는 의미가, 살려내는 의미가, 없다. 살겠다고 말한 의미가, 없다. 제 옆의 사람들이, 없다. 소년은 피와 흙으로 얼룩진 고개를 들었다. 홀로 남았다. 소년이 웃었다. 세상이 바닷물로 가득 찼다.
소년은 살겠다고 했다. 살아야만 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러했다. 어제의 소년이 제 사람을 떠나보낸 손을 들었다. 어제의 자신이 제 목을 조르고 있다. 소년은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의미마저 없었다.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 그런 심해였다.
소년이 물었다. 누군가를 지켰느냐고.
소년이 답한다. 지키지 못했노라고.
소년이 물었다. 네 의미는 무엇이냐고.
소년이 답한다. 자신의 의미는, 없다고. 그러니 끝을 내야만 한다고.
소년이 물었다. 그렇다면 봄은 어디에서 오냐고.
소년이 울었다. 네가 숨쉬던 그 때가, 봄이었다고.
소년이 울었다. 더 이상 봄은 오지 않는다고.
소년이 눈을 뜬다. 죽어 있는 갈빛 눈이 심해의 하늘을 눈에 담았다. 그 검은 빛은, 먹구름이 아닌, 살상무기의 빛. 죽음의 빛. 하늘을 가득 채운, 빛 한 점 들지 않는, 저승의 색. 심해가 소년을 들여다본다.
소년은 자신을 심연이라 일컬었다. 빛이 빛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림자가 필요하다. 소년은 자신을, 그 그림자라 여겼다. 그렇기에 자신은 빛이 없는 곳에서만 존재한다고. 빛을 빼앗겨, 어디까지나 어둠 속에서만, 심해 속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고. 소년은 그렇기에 빛을 알았다.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던 온기를 알았다. 소년이 빛 바랜 책장을 넘긴다. 그곳에 봄은 없었다.
소년이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문학과도 같은 물음이 샌다. 내 봄은 어디에 있습니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문학이 흔히 그러했다. 소년의 말은 늘 한 구절의 시였다. 봄이 사라진다.
소년이 눈을 떴다. 끌어당겨진 봄이 눈 앞에 가득 찼다. 봄의 뒤에는 여름이 온다. 숨막히는 계절. 목구멍을 태울 듯한 열기를 안고 한 조각의 자비조차 없이 온다. 소년은 숨이 막혔다. 필시 여름이 온 것일 터였다. 봄을 끌어당긴 대가였다. 소년은 봄에 태어나 온기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렇기에 열기가 자신을 죽인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보고 싶다. 소년이 중얼거린다. 의미는 없었다. 그럼에도 보고 싶었다. 만나고 싶었다. 만나러 가고 싶었다. 달려가고 싶었다. 그때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소년의 폐부로 바닷물이 들어찬다. 만나고 싶다. 그렇게 흘러나오려던 말이 바닷물에 잠긴다. 소년이 말을 더 잇지 못한다. 심해가, 심연이, 소년을 끌어당긴다. 소년은 제 폐를 가득 채우는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어제의 소년이다. 소년이 눈을 마주한다. 어제의 소년이 웃었다. 숨이 막히느냐고 물었다. 소년이 웃는다. 숨이 막힌다고 답한다. 소년이 물었다. 이걸로 끝이 될 수 있냐고 물었다. 소년이 웃는다. 끝이 될 수 없다고 답한다. 소년이 울었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었다.
소년이, 울었던가. 그렇지만 그건 무슨 의미가 있지.
소년이 눈을 감는다. 눈 앞에 그려지는 봄날. 그리고 그 사람들. 그 안에 자신은 없었다. 이름을 밝히지 못한 대가다. 소년은 그마저도 기꺼웠다. 그 안에 저마저 있었더라면, 그들을 마지막에 떠올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을 터다. 소년은 그 벌을 달게 받았다. 어차피 제가 져야만 하는 죄였다.
어제의 소년이 물었다. 네 죄는 무엇이냐고.
소년이 답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이라고.
어제의 소년이 물었다. 네가 받을 벌은 무엇이냐고.
소년이 답한다. 닿을 수 없는 봄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라고.
소년이 웃는다. 심해에서, 저만이 덧칠된 채 영원히 그 온기에 불타는 것이, 제가 받을 벌이라고.
소년이 마지막 장을 펼친다. 심해의 빛으로 온통 덧칠된 페이지. 소년은 웃었다. 그 심해의 빛에, 아직 봄의 온기가 남았다. 소년은, 그에 잠겨 모든 것을 잊지 못할 시(詩). 소년이 언어를 덮어 쓴다. 모든 기록이 소년을 얽어맨다. 소년이 기쁘게 잠식된다.
소년이 눈을 떴다. 심해가 소년 위로 덧칠된다. 소년이 눈을 감는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소년이 심해에 온전히 삼켜진다. 소년의 숨 위로 바닷물이 덧칠해진다.
당신의 봄날에 ─
끝맺지 못한 봄이, 전쟁이 끝난다.
황제를 잃은 하늘이 울기 시작한다.
19년도 8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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