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단아 사랑한다. 너는 정말 갓캐란다.
§ 멋진 로그들을 기반으로 합니다. https://posty.pe/e4c456
§ 주의: 폭력, 폭행, 상해, 살인, 약한 텍스트적 유혈 표현, 인간을 향한 비윤리적인 사상 및 대우, 범죄 미화, 캐릭터 대사 중 매우 많은 양의 욕설
§ 다수 날조 포함. 보고 싶은 장면을 위해 가볍게 썼습니다. 퇴고 거의 없음, 급전개, 맞춤법, 비문 주의.
§ 14000자 정도. 제목은 아래, GAMBLER 가사의 인용입니다.
언제까지나 소년일 것만 같은, 가벼운 발걸음이 나풀나풀 복도 위로 이어졌다. 앞으로의 일에 잔뜩 기대를 한 듯 신이 난 모양새였다. 흘러 나오는 콧노래는 먼지가 쌓여 검푸른 어두운 색을 띤 복도의 무거움과는 다르게, 한없이 즐거워 보이기만 했다. 그와 대비를 이루듯 나풀거리는 붉은 빛 머리칼이 소년의 걸음을 따라 산들거렸다.
검은 복도는 일직선으로 길게 주욱 이어졌다. 저 끄트머리, 환한 빛이 들어치는 곳과는 다르게 눅눅한 얼룩이 군데군데 묻은 복도의 안쪽은 고장난 터널처럼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이따금 열린 문틈 사이로 형광등의 잔상만이 희미하게 떨어지며 바닥에 얼룩이 아닌 그림자를 그리고는 했다. 길게도 이어진 어둠 사이가 그저 익숙하다는 듯 소년은 걸어갔다. 고작 끝이 있는 어둠에 겁을 집어먹기에는, 소년이 견뎌온 어둠이 너무도 길었다.
빛이 비치는 복도의 끝자락에서 별안간 성난 함성이 들렸다. 수십, 아니, 수백이 한꺼번에 토해내는 우렁찬 환호성. 흥분이 지나치게 녹아든 과열. 아, 방금 게임 하나가 또 끝이 난 모양이다. 사람의 피가, 살점이,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환호한다니. 인간성을 버리지 않은 이상 그것이 가능키나 한가.
그러나 소년은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에게 실망하는 것만이 그의 삶이라도 되는 듯,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여전히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철컥.
"움직이지 마."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소년이 멈칫, 발걸음을 더 떼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총을 든 채 거친 숨을 고르는 남자는 한껏 긴장한 듯 보였다. 소년은 이런 상황이 결코 낯설지 않은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남자를 빤히 응시했다. 이윽고 움직이지 말라는 말은 그새 잊어버렸는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소년이 입을 열었다.
"어디서 봤지? 저어언혀 기억이 안 나는뎅. 아저씨 우리 인사한 적 있남?"
"움직이지 말라니까!"
"응응, 들었지, 들었지. 그런데 뭔 처음 보는 구닥다리 같은 못생긴 개좆밥노친네 새끼가 시키는 대로 곱게 네엥, 알겠습니다앙, 하면 그게 씨발 나야? 존나 개염병할 캐붕난 거지? 님 저 좆도 모르시는군요?"
"움직이지 말고 손 들어!"
"안 움직이고 씨발 어떻게 손을 처들어, 새끼야!"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소년도 마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 앞에 겨누어진 것이 총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보였다. 되레, 뚫린 입이라도 된 듯 바락바락 숨 쉴 틈도 없이 고함을 질러대는 것이다.
"개씨발미친잡놈새끼가 씨부릴 거면 그 못생긴 대가리라도 좀 노력해서 오천만분의 일초라도 처굴린 티라도 내든지! 하여간 요즘 것들이란 씨발 존나 노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구만! 안 그래도 나도 존나 브랜드뉴한 요즘 것이라서 욕을 같이 바가지로 처잡수고 있는 게 존나씨발개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이런 개지랄은 존나예쁘고착하고핫한오천만가지어도러블한사유가 있는 나라고 해도 못 받아준다고 몇 번을 처말해야 그 개미 재채기보다 좆만한 미니멀 아가리에 처박힐 수가 있냐고! 이거 세계 7대 불가사의 같은 건가, 씨발? 내가 존나게 깔짝거리고 쌉염병을 처해도 왜 증명이 안 되냐고!"
소년은 제 앞의 남자가 얼빠진 표정이 될 때까지 한참을 씩씩거렸다. 누구 하나 물어본 적도 없는 욕설 한바가지를 냅다 쏟아낸 덕에 남자 역시 제가 든 물건이 총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보였다. 그렇게 떠들어 대고서야 마음이 좀 풀렸는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소년이 제 이마를 닦는 시늉을 했다. 누가 보았더라면 기도 차지 않는 꼴이라고, 당연히 손가락질을 했을 테다. 아쉬운 것은 근처에 그 '누가' 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욕을 씨발 존나 야무지게 해대서 기운이 일도 없넹. 거기 브랜드올드한 개새끼는 그냥 가보셈요. 재미있는 거 다 끝났겠다, 갑자기 의욕이 님 아랫도리 사정만큼 금방 뒤져버림······ 죽이기도 귀찮당. 운 좋은 줄 아시고, 찌질한 시정잡배 놈아."
그러더니 정말로, 소년은 저를 향한 총구는 잊어버린 듯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총을 쏠 듯이 손에 힘을 준 채 고함을 내질렀다.
"진짜 쏜다! 거기 서! 네가 죽였던 내 동생에게,"
"동생?"
동생. 그 말에 잠깐 자리에 멈춰 선 소년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복도의 끝, 어둠의 반대편에 선 빛에서 새어나오는 대함. 어둠에 익숙한 이의 눈을 금방이라도 멀게 할 듯 환한 빛 가운데에서 느껴지는 살의. 진심으로 타인의 불행 위에 서려 하는 광기. 그 가운데에서 번쩍이는, 가장 흔하여 오히려 가치를 잃은 악의.
소년은 생각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 인간이라는 것 가운데에서도 시선을 돌리지 못 했던 존재. 반드시 벗어날 수 없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
그 모든 것을 가만히 응시하던 소년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탕!
"······."
웃음기 하나 없는 낯을 한 소년이 느릿하게 고개를 내렸다.
무감한 시선이 빤히 그 아래를 바라보았다.
소리조차 내지 못 하고 죽은 것.
소년이 생각했다.
총알 아깝다.
"아쉽넹, 형을 먼저 죽였어야 했는데. 동생 쪽이 찾아왔으면 멈추는 척이라도 해줬을걸. 예의상."
"······."
"예쁘고 착하고 핫한 나를 망설이게 하려면 형 얘기를 했어야지, 모자란 새끼야."
대답조차 없이 죽어버린, 혹은 죽여버린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년은 다시 홱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은 꼭 익숙한 곳을 향하는 듯 했다. 그러니까, 꼭 그 악의를 반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주인 없는 폭력과 광기만이 소년이 머무를 곳이라는 것처럼. 자신이 방금 죽인 사람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니까 소년은, 고작 15분도 안 되는 시간의 일로 하루를 망치고자 하는 어리석은 이가 아니었다.
*
소년이 안내받은 곳은 VIP석이라고 했다. 한 발짝 내딛을 틈도 없이 시끌시끌하게 북적이는 아래와는 다르게, 경기장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 한 층 위. 폭력의 값을 비싸게 지불하는 대신 다른 누구보다 생생하게, 그리고 우월하게 그를 내려다 볼 권리를 부여받는 곳. 감히 위라는 장소를 점유할 수 있는 소유권이 주어지는 곳.
"래하야, 거기서 뭐 하냐. 그러니까 당연히, 거기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의 정보는 영업 기밀이야. 회원들끼리도 당연히 모르고. VIP 회원들은 서로가 누군지도 모르고 같이 박수치고 어깨동무하고 술을 퍼마신다고. 사람들 틈 기웃거릴 거면 애초에 들어가지 마. 아무리 너라도 몇 백을 어떻게 밟고 나올래."
출입구에서 꼭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것 같은 마스크를 받았을 때도, 그래서 소년은 당황하지 않았다. 꼭 자신을 위해 준비한 것만 같은, 검게 반짝이는 마스크를 받은 소년은 활짝 웃으며 그를 직접 썼다. 존나 핫하네용! 마법소녀 변신이라도 할까봐! 만족스러워 보이는 소년의 말에도 직원은 비즈니스적인 미소만 지었다. 아마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훈련을 받았을 테다.
"래하야, 이 새끼야, 형들이 주는 거 아무거나 주워먹지 말라고 내가 몇 번 말하냐. 운별이 형이 주는 거만 아무거나 주워먹으라고, 나머지는 나한테 제발 좀 물어봐라. 그래, 그러니까 너도 거기 가서 괜히 사고 일으킬 생각 하지 마라. 물론 너 같은 미친새끼는 숨쉬는 것 자체가 사고긴 한데, 너 하나만 아니라 주변까지 죄다 위험해져. 우리는 기본이고 우리 거래처, 연락하는 정보상, 다른 조직 연락책, 줄줄이 빨간불 켜지게 된다고. 래하야, 빨간 색이라고 전부 현운이 형 얘기는 아니에요, 미친 새끼야. 사람한테 불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건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미친 놈아."
소년은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곱게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남겨준 후, 아래가 잘 보이는 난간에 몸을 기대며 자리를 잡았다. 고막이 데일 것 같은 환성이 쏟아지는 아래의 열기는, 위에서 내려다 보니 더욱 천박하게 보였다. 픽, 비웃음을 흘린 소년은 지나가는 직원에게서 샴페인을 한 잔 건네 받은 후 반절을 쭉 들이켰다. 여기서 제일 좋은 건 샴페인 밖에 없네, 나머지가 하도 구려서. 짭짭, 입맛을 다시던 소년은 마침 하나의 게임이 끝나고 피투성이가 된 채 질질 끌려가는 패자를 지루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도 직접 가본 적은 없어, 그 콜로세움에 놀러가는 건 꽤 높으신 분들한테만 해당이 되는 얘기였거든. 애초에 별 관심도 없었지만. 아니, 한 번은 가보는 게 좋아, 그놈들 요즘 그 근방을 꽤 주시하고 있다더라. B 후보를 새로 물색하는 것 같은데, 그중 하나가 콜로세움 근처에 자주 보인대. 이름은 서비훈, 나이는 너랑 비슷하고. 세력은 없는데 만나는 것들마다 그놈 앞에서 굽신거린다는 얘기가 있어, 그러면 보통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거든. 건드릴 만한 가치가 없는 놈이라면 모르겠는데, 들리는 소문을 보면 그놈도 보통으로 그칠 것 같지는 않아서. 가능하다면 우리 쪽으로 돌릴 수 있는지 한 번 보고 와, 그 콜로세움에 우리가 발도장 찍을 수 있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고. 래하야, 내가 네 도장을 대체 어디에다 써야 할까, 이 새끼야."
그런 것치고는 눈에 별로 걸리는 게 없는데. 한 번 싹 엎어서 하나하나 뒤져봐? 존나게 엎고 은이 형한테 뒤지게 혼나기, 그냥 지루한 곳에서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기. 샴페인 잔을 매만지며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을 이어가던 소년은, 별안간 아래에서 들리는 벼락 같은 아우성에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와아아아!"
"오늘의 하이라이트 경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하이라이트 경기? 소년이 난간에 기댄 채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총성과도 같은 함성, 아니, 차라리 스콜처럼 우르르 쏟아지는 환호성이라고 해야 옳았을 테다. 지금까지 들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함 소리에 소년이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이거 큰 놈 하나 오시는 모양인데.
"하루에 한 번, 하이라이트 경기가 있어. 시시한 놈들끼리 싸우게 시키는 건 재미가 없으니까, 마지막에는 꽤 괜찮은 놈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거지. 하루마다 치러지는 파이널 라운드 같은 거야, 그때는 판돈도 더 커지고. 거기서 오래 살아남은 놈들은 별명도 생겨. 괜찮은 놈들은 따로 스카우트 해가는 경우도 있고. 다들 그 경기를 보러 오는 셈이지. 너한테는 재미 없겠지만, VIP들은 대부분 그 경기를 보러 모여. 자리를 떴던 사람들도 그때는 웬만하면 다시 돌아온다는 얘기야. 그러니까 하이라이트가 시작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해, 원하는 건 그때만 얻을 수 있어."
너무 태평해서 졸겠는데 무슨 놈의 하이라이트.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지루하다는 듯 내려다 보던 소년이, 막을 걷고 쨍한 스포트라이트 아래로 걸어 들어오는 남자 둘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꽤 나이가 있어 보였고, 하나는 어려 보였다. 저 정도면 내 또래라고 해도 믿겠네, 진짜 별 새끼들이 다 기어 들어오는구만. 소년이 피식 웃었다.
"선수, 입장."
속삭이듯 중얼거린 소년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VIP들이 모이는 시간, 이제 자신의 일을 할 차례였다. 야유와 환성을 지르는 가면들 틈으로, 소년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저런 놈들의 삶과 죽음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의 것조차 관심이 없는데 저런 시시한 새끼들까지 일일이 환호해서 어쩌려고.
하여간 모자란 새끼들. 소년이 중얼거렸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비훈인지 뭔지 하는 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렇게 쉽게 움직일 놈이면 애초에 마르스가 눈독을 들이지도 않았겠지. 소년은 텅 빈 샴페인 잔을 하릴없이 등 뒤로 내던졌다. 쨍그랑, 난잡한 소리가 울렸지만 그 누구도 신경을 쓰는 이가 없었다. 아마 하이라이트 경기인지 뭔지에 눈이 팔렸겠지. 아쉬운 대로 여기나 좀 뒤엎고 가볼까, 먼 곳까지 걸음한 보람이 좀 있으려나. 그렇게 고민하며 소년이 다시 자리로 돌아올 무렵이었다.
"노냐?"
"경기 중에 뭐야!"
"쳐! 완전히 다운시켜!"
난데없이 들려오는 야유에 소년이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이상하네, 시간이 꽤 지났는데. 경기가 끝나고도 남았어야 하는 시간이 아닌가. 하이라이트 경기가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 이유가 무엇인가. 원래 모자란 것들은 뭣도 모르고 남들이 터뜨려 준 사이다를 가장 좋아하는 법이 아닌가.
그리고 소년은.
"······아. 어쩐지."
웃었다.
아, 진짜 인간이란.
이런 진흙탕 꽃에서도 연꽃인지 끔찍한 지옥도인지를 결국 피워내고야 마는, 징그럽기 짝이 없는 빌어처먹을 놈의 인간이란!
난무하는 핏방울이 멀리서도 눈에 잘 들어오도록 쨍하게도 내리쬐는 스포트라이트, 그 아래에 잘 다져진 고기처럼 진열된 패자, 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두 다리로 선 채 숨을 고르는 승자. 무관심한 시선에 순간 담았던, 어려 보이는 남자가 링 위에 서 있었다. 홀로.
소년은 저런 이들을 지금껏 숱하게 눈에 담아왔다. 한 방이면 끝날 상대를 눈앞에 두고, 주먹을 들지 못 하고 숨만을 내쉬는 것들. 망설임인지 미련인지 후회인지 모를 것들이 시야에 가득 차 생각에 잠기는 것들. 최후 앞에 섰을 때 가장 떳떳하지 못 한 표정을 짓는 것들.
그러니까, 저것은.
"여리구나. 가엾게도."
저것은 여리다. 착하고. 가엾으며. 아직도 버리지 못 한 것을 품었다. 모든 것을 난도질 당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가혹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조차도.
소년은 이름조차 알지 못 하는 가엾은 것을 내려다 보며 낮게 웃음 소리를 흘렸다. 저런 게 이런 곳에서 용케도 아직 남아 있구나. 결국 끝낼 놈은 자신 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 한 가닥에 스스로 고통을 자처하는 것들.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 죽이지 않으면 죽는 곳에서 망설임이라는 독을 스스로 마시는 것들. 결국 구원받을 수 없는 삶임을 알면서도 기어코, 고문 밖에 되지 못 할 희망을 품고야 마는 것들.
그를 증명하듯, 자리에 선 남자는 휘청거리던 패자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창 다른 생각하고 있겠지, 소년이 코웃음을 흘렸다.
패자는 작은 칼을 쥐고 있었다. 시작할 때는 없었는데, 아마 어디 다른 곳에 숨겨두었다가 핀치일 때 꺼내 들 생각이었겠지. 휘청거리며 일어선 패자는,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칼을 쥔 팔을 마구 휘둘렀다. 오, 저렇게 망설이다 죽으려나. 소년이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듯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패자의 칼은 허무하게도 허공만을 휘저었다. 아, 저렇게 말랑한 새끼들이 둘이나 링 위에 서서야. 고작 이딴 시답잖은 것도 하이라이트라고. 소년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참 마음에 들어, 하이라이트라는 게 이렇게 시시하다는 게. 그리고 드디어, 목덜미가 서늘해진 남자도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망설임. 한때는 그런 마음을 품으려 했던 소년이 느긋하게 미소를 지으며 난간에 팔을 기댔다.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을 사랑스럽게도 내려다 보며 턱을 괸 소년은, 결국 울려야 하는 마지막 종소리를 참을성 있게도 기다렸다.
이곳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그 하나였다. 아무리 미루어도, 아무리 도망치고 싶어도 결국 마지막은 찾아온다는 것. 그 끝을 내는 것은 그리고, 온전히 서서 운 좋게도 숨을 쉬고 있는 망설임이어야 한다.
망설임은 곧 승자의 사치. 죽음 앞에서는 산 것만이 그런 고통을 누릴 수 있기에. 그렇기에 사는 것이 그토록 잔인한 것이다.
"와아아아!"
결국. 터져 나오는 폭발음과 같은 환호가 좁은 공간을 웅장하게도 울렸다. 그에 감탄하듯 바닥으로 떨어진 패자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승자는 자리에 서서, 내리는 비를 맞듯이 함성을 그저 견뎌내고 있었다.
소년은 그를 응시했다. 거리가 멀어 승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 목을 겨누었던 칼을 아무렇지 않게 줍는 손 끝에서, 소년은 공허한 절망을 읽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등에서는, 기나긴 삶에 지친 한숨을 읽었다. 멈추지 않는 텅 빈 발걸음에서는, 그의 구원에서 이미 가치가 사라졌음을 읽었다.
아우성이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사회자 비슷한 것이 마이크를 쥐고 다음 경기를 박진감 넘치는 목소리로 예고했다. VIP석도 점점 비어가기 시작했다. 불이 꺼진 무대 위, 점점 줄어드는 악의의 틈새를 구경하던 소년이 생각했다.
저 다수의 악의 앞에서, 고작 구원을 바라는 마음은 어디까지 하찮아질 수 있을까.
결국 그 어떤 구원도 의미를 품지 못 할 텐데.
중요한 것은 그저, 구원 앞에서 어떤 것의 의미를 버릴지 선택하는 것뿐이다.
"너도 언젠가는 선택해야 할 거야. 택할 수 없다면 달아나야 할 거고."
하지만 그 무엇도 살아있다는 것보다 고통스럽진 않겠지. 결국 죽지 못 하는 것아.
텅 빈 경기장을 바라보던 소년은, 불이 꺼진 스포트라이트에서 흥미를 잃은 듯 매몰차게도 걸음을 내딛었다. 어쨌든 이곳에 온 목적은 전부 달성했다. 흥미로운 것을 보았으나 그저 그뿐.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 뒤는 얼마든지 지루해질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흥미조차 없는 것에게 굳이 시간을 소모할 만큼 한가하지는 않았다. 증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몫이다.
그래도 그건 재미 있었으려나. 마스크를 벗으며 소년이 생각했다. 하이라이트에 그런 하찮은 놈을 내보낸 것 말이다.
괜찮아 보이는 놈 같으면 언젠가 한 번은 구해줄까. 진흙탕 속에서 잎을 피우려 애쓰는 연꽃을 건져주었다가는 연꽃이 죽어버린다. 하지만 잎 하나 피어나는 것쯤 도와준다고 무슨 일이나 나겠어.
*
"어, 나야. 그 새끼 없던데? 무슨 놈의······ 뭐더라? 투우? 인지 뭔지도 좆도 재미도 없었구. 우니 심심해 오빵."
-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씨발 새끼야.
"에잉, 그로케 욕하면 미워잉. 시키는 거 다 했잖아! 얌전히 기다려줬지, 욕도 안 했지, 사람도 안 죽였지, 아, 죽였네."
- 뭐 이 새끼야? 그새를 못 참고 또 거기 들쑤셔놨어? 야, 인마!
"아, 거기 사람 말고 다른 놈 죽였어. 난생 처음 보는 미친 놈이 갑자기 총을 꺼내더라고요? 아는 사람인 줄? 형은 걔 기억해?"
- 얼굴도 안 보여줬는데 뭘 어떻게 기억해, 미친 새끼야!
"맞넹? 근데 걔 내가 죽여버려가지구 얼굴이 없당. 다시 들어갈까? 잠깐 들어가서 셀카만 찍고 나오겠다고 하면 보내주나? 안 되겠지? 에이, 어쩔 수 없지, 존나 씨발 개착한 내가 또 빌어줘야겠다. 얼굴도 모르는 모자란 새끼지만 나쁜 곳으로 가세용."
- 아오, 이 모자란 새끼······ 다른 곳 들쑤시지 말고 빨리 기어처들어와, 새끼야! 내가 너 때문에,
"넵, 저도 사랑합니다, 형님. 메로나 사가께요, 넵, 끊으께요, 사랑합니다, 넵."
어우, 전화를 잽싸게 끊은 소년이 진절머리를 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착하고 예쁘게 시키는 대로만 조신하게 했는데 이 형은 왜 또 성질을 낼까. 이 형님도 진짜, 이렇게 마음이 급해서 아마 오래 못 살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던 소년이 혀를 차며 허리를 숙였다.
소년의 발치에는 오물과 피에 젖어 움찔거리는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조금 전, 하이라이트 경기에서 보았던 패자였다. 지고 나면 이렇게 바로 버리는구나. 살지도 못 하게. 여기는 정말 이긴 놈만 살 수 있는 시스템인가보네. 인간을 무슨 게임 캐릭터 취급이라도 하는 것처럼.
무감한 낯으로 그를 내려다 보던 소년은, 조금 전 승자가 남겨주고 간 것에 흘긋 눈길을 주었다. 남자의 손목에 걸린 비닐 봉지. 그 성정에 죽으라고 주진 않았을 거고. 분명 양심의 값을 남겨두고 갔을 텐데. 하여간 사치스러운 새끼야, 목숨이 먼저인 판에 양심을 먼저 살려놓다니. 소년은 손을 뻗어 그를 슬쩍 열어 보았다. 그리고.
"······하, 씨발······ 이 새끼 존나 귀엽네."
헛웃음을 흘린 소년이 아예 남자의 손에서 비닐봉지를 빼냈다. 그 안을 헤집는 손에 걸려 바스락거리는 것은, 전부 현금이었다. 빳빳해서 손이라도 베일 것 같은 새 지폐. 아마 우승 상금이겠지. 진 놈을 야멸차게 내다 버리려면, 이긴 놈에게는 그 입을 다물고 승리에만 도취되기 위한 수단을 준비해 두어야 했을 테니까. 이거 다 얼마야. 한 삼백은 되려나?
"사람 하나 조지면서 아이돌 한 번 되는 걸로 삼백······ 존나 씨발 개짜게 주네. 소금 없어도 밥 먹겠다."
하지만. 소년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저편에서 터덜터덜, 힘도 없이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참, 알기 쉬운 놈이야. 들어가서 구역질이나 해대려나.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담. 소년이 눈가가 휘어지도록 곱게 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죄책감 잠깐 조져주는 값으로는 충분하지."
저런 뜨뜻미지근한 구원이 가장 고통스러운 법인데. 하여간 마음만 가진 새끼들은 이런 세심함이 부족해. 마음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거든. 될 줄만 알아,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도 아닌 게.
이를 드러내며 웃은 소년이 비닐봉지를 내버리듯이 옆으로 휙 내던지고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발로 봉지를 툭툭 건드리며 돈을 바닥으로 쏟아내던 소년은, 손으로는 바쁘게 연락처를 뒤지며 스크롤을 내렸다. 곧 어딘가로 전화를 건 소년이 핸드폰을 어깨와 목 사이에 끼워넣으며 입을 열었다.
"나예요. 아리따우신 누님 오늘 시간 되시남? 응, 애새끼들 데리고 출장 한 번 나와줘. 네엥, 이백이면 되겠죠? 더? 에헤이, 또 존내 욕심 부리신다, 이거. 전에 백오십이랬잖아염, 님아. 왜 점점 손을 더 벌려, 씨발 잘라드리고 싶게? 삼백은 안 돼, 메로나 사가야 되거든. 당연히 내 애새끼가 더 중요한 거 아냐, 오늘따라 곱다 싶더니 머리꼭지 삭제하셨어? 존나 씨발 또 오래 살았다 싶어? 이백오십? 그으랭, 내가 봐줬다. 응, 이거? 다 뒤져가는데······ 모가지 좀 나가신 거 같고. 어깨 빠졌고, 팔? 팔은······ 모르겠네. 날아갔나, 부러졌나. 다리는 확실히 부러졌고. 나머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네, 존나 예쁜 내가 모르는 아저씨 옷을 막 들추는 것도 좀······ 나 곱게 컸어, 누님. 응, 씨발 구라야, 빨리 처오기나 해, 일감 뒤져서 메스 대신 삽들기 전에. 네엥."
전화하는 내내 대충 한 뭉치 정도 지폐를 주워들은 소년이, 어깨에서 팔까지 주르륵 핸드폰을 떨어뜨려 낚아챘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소년은 지폐를 세어보지도 않은 채 주머니에 대강 쑤셔넣었다. 사람 하나 귀찮게 살려줬는데 이 정도면 싸게 받은 거지. 피차 빚 없는 게 좋고.
"한 번은 구해주자 싶었는데······ 이걸 이렇게 구해주네. 나는 박해서 덤은 안 드리는뎅."
자기 앞가림도 못 하면서 무슨 사람을 살리겠다고, 사람 죽이는 일 하는 새끼가······ 잠깐. 그런 일만 하고 지금까지 살았으면 저렇게 두 발로 걸어갈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손을 탁탁 털어내던 소년이 문득 저편의 인영으로 다시 향했다.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년은 어딘지 찝찝한 표정을 짓다 곧 인상을 쓰며 몸을 돌렸다. 뭐, 이 정도 해줬으면 할 거 다 했지. 이러다 나 내일 뒤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착했지. 한 번을 구해줬으니 두 번부터는 제 선택이다. 그 이상은 흥미를 가질 마음이 없었다. 이 바닥에서 얽혀봤자 목표물로 만나는 것 말고 더 연이 있나.
금세 있었던 일들을 싹 지워 버린 소년은 다시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있으면 형이 저녁 만들 시간이니까 그전에 메로나도 사고, 막내 줄 레몬 쿠키도 사고, 주말 내내 쌓아둘 사탕도 사야지. 그리고 택시까지 존나 야무지게 타고 돌아가야지. 하나를 살렸든, 하나를 죽였든, 하나를 놓쳤든, 하나와 만날 예정이었든. 있었던 그 모든 일보다 쌓아둘 사탕이 더 중요하다는 듯 곧장 관심을 꺼버린 소년이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 모든 삶 위로 공평하게.
*
"분명히 그랬는데 말이지."
벌겋게 피가 묻은 손을 닦아내며 소년이 중얼거렸다. 옆에 앉아서 책장을 넘기던 남자가 그 말에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뭐가."
"오늘 골목에서 웬 개잡놈들이 앞길 막으면서 존나 깔짝거리길래, 성질이 나서 그냥 다 팼거든요? 그런데 그 쌉놈들이 마침 어떤 새끼 하나를 줘패고 있더라고? 얼마나 팼는지 애가 존나 찜통 들어가기 직전의 떡고물처럼 됐단 말이지?"
"그래서 그 새끼도 조졌다고?"
"뭐래, 내가 형처럼 그렇게 인정머리 없고 싹퉁바가지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어서 보이는 새끼마다 뒤탈이 없어야 된당! 하면서 다 조지는 싸이코패스 새끼로 보여요? 형 지금까지 날 그렇게 보고 있었어, 씨발? 이거 존나 씨발 눈물나도록 개섭섭하네? 잠깐 있어봐, 나 지금 눈물 흐르기 직전이야. 어어 흐른다. 이거 봐! 빨리!"
"너 싸이코패스 맞아, 또라이 새끼야.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내가 그 새끼를 구해준 셈이 됐길래······ 기분 나빠서 그냥 버리고 왔는데."
"싸이코패스 확실하네. 왜 의심하고 지랄이야, 네가 그럼 정상인 줄 알았어?"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남자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저 놈 헛소리를 다 듣고 앉아 있네, 그동안 많이 착해졌다. 남자의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아닌뎅, 절대 아닌뎅, 하고 투덜거리던 소년이 깨끗해진 제 손을 내려다 보았다.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 이제 래하가 기겁하지 않겠지.
"그런데 그 새끼 어디서 본 거 같단 말이지. 어디서 봤을까?"
"그걸 나한테 물어보시면 씨발 내가 어떻게 알까."
"낯이 묘오오하게 익은데······ 내가 한 번 본 얼굴을 까먹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그만큼 중요한 새끼가 아니었나? 그럼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놈을 내가 살려준 거야? 하······ 씨발, 나 왜 이렇게 착해졌지, 오늘 줘팬 놈들이 나 지옥 가라고 했는데. 안 되겠다, 나쁜 짓 좀 해야겠어. 형, 나 좀 나갔다 올게. 이러다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받겠다."
"앉아라. 네가 숨만 쉬고 있어도 충분히 나쁜 짓 하고 있으니까."
"존나 예쁘고 착하고 건강하게 숨도 잘 쉬는 내가 씨발 대체 뭐가 나쁜데!"
"내 건강에 나빠, 미친 새끼야. 앉아."
내가 다음에 나가면 형 메로나만 빼고 다 사올 거다, 하고 저주를 퍼붓던 소년이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하여간, 그 얼굴을 정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인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그래, 그 얼굴을 어디서 봤는데, 분명히. 어디였을까. 진흙탕에 가라앉고 싶어서 난리를 치던, 어둠과 빛의 경계선에서 하고 싶은 말이라고는 없어 보이던, 어려 보이는 얼굴.
"이상하게 나 같았는데."
"모르는 사람이라면서 그렇게 심하게 욕하지 마라."
들린 대꾸에 바락바락 소리도 지르지 않을 정도로 생각에 잠겼던 소년은, 잠시 말이 없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역시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중요하지 않은 놈인 게 분명해. 밥이나 먹어야지! 형, 오늘 저녁 당번 누구지? 래하인데. 이런 씨발! 밥도 글렀어, 오늘 무슨 날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소년은 아무것도 몰랐다.
며칠 뒤 자신이 몇 번이고 놓아주었던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당연히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써 달라고? 너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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